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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tor Ha Nov 03. 2019

리처드의 십자군 Vs 살라딘의 이슬람군

Lionheart 리처드 1세, 예루살렘으로 향하다.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에게 점령당한 후 중세 유럽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이에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제3차 십자군이 결성이 되면서 영국의 리처드 1세(*Richard the Lionheart or Lionhearted, French Richard Coeur de Lion,1157년~1199년)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영국 국왕으로 즉위 이전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봉건 제후였던 리처드 1세는 아버지 헨리 2세와 형제들과의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필자 주 : 이 이야기만 서술해도 책 한 권의 분량은 나올 것 같지만 차후 영국 문명 탐험시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영국의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프랑스령인 노르망디 공국의 영지와 영국이 하나의 왕국령으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유럽사의 경우 지금의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런 괴상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유럽 내 유력한 소수 왕족, 귀족 명문가 출신들끼리 결혼을 통해 복잡 다단한 가족 관계를 형성하면서 특정 왕국에서 왕이 죽고 재위를 물려받을 유력한 자손이 없을 경우 이웃 왕국 내 친족 관계에 있는 왕 또는 봉건 제후가 그 재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리처드 1세의 경우 비록 영국의 국왕이었음에도 실제로 영국에 체류한 기간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며 주로 영어보다는 프랑스어를 사용했다고 하니 확실히 중세 유럽 봉건사히는 현재 영토, 국민, 언어등등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 국민국가 관점에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정치 체제를 지니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Richard 치세 영국과 노르망디 공국


예루살렘 점령을 계기로 일약 이슬람의 위대한 영웅으로 부상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과 영국의 국왕이자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영주인 리처드 1세가 드디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만나게 되는데 일설에 의하면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도 대량 학살을 자행하지 않고 카톨릭 세력들을 인도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우해준 것에 대한 소문을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리처드는 살라딘을 존경했다고 하며 살라딘 또한 리처드의 명성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흠모는 했을지 몰라도 공적으로는  이 둘 라이벌은 카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을 대표하는 왕과 술탄으로서 서로를 반드시 이겨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리처드는 이슬람령이 되어버린 가톨릭 성지 예루살렘을 다시 되찾아 성지 탈환이라는 3차 원정의 목적을 소기에 달성하고자 하였고 살라딘은 이슬람의 성지,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예루살렘을 카톨릭 세력으로부터 탈환한 후 이슬람의 통일 대업을 완수해야했기에 예루살렘성을 반드시 수성해야 했다. 이 둘 세력은 서로간의 확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십자군 전쟁 사상 가장 극적이고 드라마같은 제3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다.

드라마는 항상 극적이여야 재미있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이겨버린다면 그 드라마는 재미가 없다. 1차, 2차 십자군 전쟁은 그야말로 결과가 뻔한 스토리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 뻔해보였던 드라마는 다시금 리처드에 의해서 극적으로 변해가는데 그때가지 연전연승을 하며 일방적으로 십자군에 승리를 했던 살라딘이 리처드와 맞붙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빼앗아야 하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처절한 사투,, 제 3차 십자군 전쟁이라는 드라마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Richard the Lionheart

제3차 십자군 원정 초기는 신성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필립 2세 및 영국의 리처드 1세가 참전을 결정하면서 병력의 양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이전의 십자군 원정때보다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하였다.

아래 3차 십자군의 육상 및 해상 병력 이동로를 보면 리처드 1세와 필립 2세의 경우 지중해 해상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발칸 지역 및 비잔틴 제국을 거쳐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터키 지역 행군 시 킬리키아(*영문명 : CILICIA, 아래 지도 내 가장 진한 분홍색 영토내 위차 표기됨) 지역의 사례프강에서 익사를 하면서 전쟁에 참여를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3차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기 전 전쟁 치르고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영국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왕 필립 2세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면서 십자군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진 정치/군사조직체안에서 둘은 어쩔 수 없이 연합을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뤄졌다. 그만큼 중세 사회는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것이다. 리처드의 경우 자신의 자산 대부분을 처분하고 원정길에 올랐다고하니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다.


참고로 하기 지도상에 표기된 지중해 십자군 해상 원정로는 반드시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당시 이탈리아는 지금의 통일된 이탈리아가 아닌 여러 중소규모의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었다.)를 거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십자군 전쟁이 장기전으로 진행되면서 이탈리아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며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제노바, 베네치아의 급격한 경제 성장은 또한 부유한 상인 세력들을 성장시키면서 15C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지중해 무역 및 경제권을 장악한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추후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전쟁비용을 갚지 못했던 제5차 십자군을 뒤에서 조정하여 그들이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침략하여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적도 있다.  

3차 십자군 육상 및 해상 이동로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전 현재 프랑스령인 노르망디 지방 지배권을 둘러싸고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으나 부차적으로 혈연적인 악연도 있었는데 프랑스 필립 2세는 아버지 루이 7세의 아들이었고 리처드의 어머니는 필립 2세의 아버지 루이 7세에게서 버림을 받고 영국의 헨리 2세에게 다시 시집을 간 알레오노르(*프랑스어 : Aliénor d'Aquitaine)였던 것이다(*필자 주 : 정말 헷갈리지 않은가? 정말 복잡하고 근친상간의 끝을 보여주는 가계도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유럽의 왕가 가계도인 것 같다). 그녀는 당시 중세 프랑스 지역 내 가장 부유한 봉토였던 아키텐 공국(*Aquitaine, 포도주로 유명한 지금의 보르도 지방을 포함한 봉건령, 아래 지도내 동그라미 표기내 지역)의 공작이면서 푸아티에(Poitiers, 아키텐 공국의 수도격) 백작령의 백작이면서 추후 결혼을 통해 노르망디 공국에 대한 소유권도 지니게 되면서 막강한 경제권을 보유하였다. 그만큼 경제적으로는 프랑스 국왕을 압도할만큼 부유했고 또한 이 때문에 유럽의 각 왕들 및 제후들이 알레오노르와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알레오노르는 자신을 보호해줄 보호자로서 당시 노르망디 공국 영였던 리처드의 아버지 헨리 2세를 눈여겨 보고 있었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이혼하자 말자 헨리 2세와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로써 지금의 프랑스 땅 대부분이 영국 국왕의 통치를 받게되다. 소유 개념에 있어서 땅이라는 공공재는 지금의 시민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에서 통제하는 공적 개념에서의 국가의 소유물로 간주하기 보다는 국왕 또는 봉건 영주들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사적 지배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적이면서 또한 공적인 결혼을 통해 영토 및 재산의 사적 이동이 가능하던 때였다.


하기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왕가의 직속령의 크기가 아키텐 공국의 공국령보다 작은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사실 땅의 크기도 중요하겠지만 아키텐 지방은 전통적으로 북부 프랑스지역보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했기에) 필립 2세 입장에서는 자신의 직속령보다 알레오노르를 비롯한 영국 왕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해당 봉건령에 대한 직접 지배권을 되찾고 싶어 했을 것이고 알레오노를 비롯한 영국의 리처드 1세, 그 뒤를 이은 존 왕은 아키텐 공국, 푸아티에 백작령 및 노르망디 공국은 왕가에 속한 지배령임과 동시에 왕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프랑스로부터의 침략을 봉쇄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둘의 견원지간 관계는 잠시나마 살라딘의 예루살렘을 탈환으로 협력의 관계로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지만 3차 십자군 전쟁 내내 불화를 겪었으며 필립 2세는 아크레 성 탈환 후 프랑스로 돌연 귀국해버렸다.   


1191년 드디어 역사적인 두 영웅 간의 성전이 시작된다. 성전의 시작점은 바로 팔레스타인 연안지역인 아크레(*Acre)로 리처드 1세가 도착할 당시 하틴 전투에서 대패한 후 절부심해 있던 기 드 뤼지냥이 유럽 각지에서 끌어모은 연합부대를 조직하여 아크레 성을 공격하고 있던 시기였다. 양 세력은 1189년을 시작으로 2년간 지루한 공성전을 계속하고 있었고 아크레 성을 지원하기 위해 살라딘이 대군을 이끌고 기 드 뤼지냥의 2만 군사를 사방으로 포위 및 압박을 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지역 Acre, Arsuf 및 Cyprus(왼쪽 상단 짙은 분홍색지역)


리처드는 아크레(Acre) 성을 공격하기 전 사이프러스 (Cyprus)을 점령함으로써 전쟁 착수 전 가장 시급한 보급로를 확보하였고 드디어 1191년 5월 100여 척의 대 선단에 몸을 실은 직속부대 8천 명과 함께 아크레에 큰 어려움 없이 도하를 하게 되고 아크레 성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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