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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당 Jun 08. 2022

50살 성장 일지

열심히 달리는 스스로를 안아주자.

남편의 그늘 아래 30여 년을 살다 보니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 두렵고 나 스스로가 너무나 무능한 인간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스펙을 따지는 세상에서 어찌 이리 바보처럼 살았을까... 하는 자책

세상 물정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비록 아이 셋이 딸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날 거절하는 것 같아 완전 바닥까지 내려가 땅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절망 가운데 있었다.

내가 가진 소위 스펙은 23살 때 졸업하며 취득했던 영양사와 10여 년 전 42살에 겨우 공부했던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가진 능력의 전부였지만 영양사도 글로만 오래전에 배운 것이고 컴퓨터도 집에서 끄적거리는 정도여서 정말 보잘것이 없는 슬픔 가득한 무능력자였다.

그러나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나였다.

52살이 되어 내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늦었지만 나의 커리어를 찾고 만들어 나가고 싶은 열정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닥치는 대로 동네 정보지를 뒤적이고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져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니 두려웠다. 그냥 이대로 주저 않아 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대로 살다가 죽고 싶었다. 

생활정보지 구직난을 보니 0 죽이라고 하는 곳에서 3시간 설거지를 하는 사람을 뽑는다고 하였다. 주눅이 잔뜩 들어 한 줄밖에 쓸 것이 없는 이력서를 들고 갔더니 이미 서너 명이 와있는데 모두 경력자였다. 설거지도 경력이 필요한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무경력 자라 탈락이었다. 난 정말 이런 일도 못하는 하잘것없는 인간이구나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순간이었다. 다음엔 롯 0 시네마에서 청소하는 일은 00 환경에서 구하고 있었다. 이력서를 넣어놨더니 전화가 왔는데 세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이 일이 하찮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영화관에서 관객이 다 나간 후 청소를 한다고 하면 아이들이 왠지 마음 아프게 생각할 것 같아서 가지 않기로 하였다.

혼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노동부를 찾아가서 제가 일자리가 필요해서 왔습니다. 했더니 이것저것 적으라고 하고 컴퓨터를 두들기더니 00 일자리 알선기관을 찾아 가보라고 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마음으로 알려준 곳을 찾아갔더니 몇 개월 상담을 받고 지금 생각해 보니 구직상담을 하고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곳이었는데 나는 당장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을 해야 무너진 나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도 없이 하루하루 허송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돈보다도 사회에서 거절당하지 않고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무너진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는 일이 절박한 시간이었다. 

00 병원에서 조리원을 구하는데 가보겠냐고 연락이 와서 한 줄짜리 이력서를 들고 갔더니 역시 서너 명이 와인었다. 다행히 그곳에 취직이 되었는데 첫날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이 바쁘고 난생처음 해보는 일에 어리바리 바보같이 굴며 하루하루 적응해 나가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그때 아무것도 모르를 나를 많이 구박하지 않고 뭐하다 왔냐며 챙기고 알려준 한때 동료였 던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할 줄 모르고 아는 것이 없으니 남들보다 30분 한 시간 일찍 가 서 꾸물거리며 내가 담당해야 하는 일을 해내고 다음엔 영양사로 취업하기 위해 그곳 영양사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열심히 관찰하며 메모하고 집에 와서는 그날그날 입고되었던 야채의 양과 조리가 되어서 나왔던 음식을 보며 내가 영양사로서 근무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쌓아나갔다. 대량 솥에 밥을 하고 죽을 끊이고 국을 끓이고 찬을 담고 설거지를 하며 점차 업무에 적응하였으나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아프고 손가락 관절 마디마디가 이리 아플 수가 있다니!   처음 알았다. 지금도 단체급식 현장에서 많은 이들의 한 끼 식사를 위해 열심히 조리하시는 선생님들의 수고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후에 나의 주방에서 일하시는 선생님들 손을 만질 때면 벌겋게 관절이 부으신 그 손의 고통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임을 이해한다. 

잠시 요양병원에서 후임 영양사로  근무한 후 현재의 요양원에 입사하여 어르신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드시기 좋은 맛 좋은 음식을 하기 위해 주방 선생님들과 열심히 노력했다. 행복한 영양사로 2년을 근무했었다. 

물론 처음에는 사회복지과장이 자기는 바쁘니 말 시키지 말라는 결국은 당신 맘에 들지 않는다는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으나 말 시킬 일을 만들지 않고 내가 할 일은 잘해버리자 하는 각오로 잘하는 척 자신 있는 척 전문가인 척을 서너 달 하고 나니 나 스스로가 조금은 위로가 되는 커리어를 쌓아가는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벌써 3~4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의 나의 도전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 모두는 스스로 사랑받을만한 소중한 존재임을 말해주고 싶다. 삶에 애착을 가지고 당당하게 파이팅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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