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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창우 Nov 21. 2023

노인을 위하지 않는 세상에서 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들어가며

 영화의 세 중심인물은 모스, 쉬거, 벨이다.

 이 중 실제 주인공은 벨이다. 모스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그는 중후반부에 비명횡사해 버리고 죽는 과정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중반부에 스릴러 극의 맥을 빼놓는 듯이 노인의 잔소리 같은 회한만 늘어놨었던 벨이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진짜 주인공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벨의 시점에서, 다시 말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노인의 시점에서 보인 세상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스와 쉬거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좀 더 명확해진다.


쉬거와 모스

쉬거

 쉬거는 1차적으로 혼돈, 통제 불가능성, 우연, 불확실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더 나아가 쉬거는 노인의 눈에 비친 불가해한 새로운 세태를 의미한다. 작게는 이상한 헤어스타일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무 의미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노인에게 기존의 문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새로운 혼돈이 쉬거라는 상징적인 인물에 집약돼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원론적으로는 상하방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지만, 인간은 위험 회피적이기 때문에 하방의 불확실성을 더 크게 생각한다. 하방의 끝단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노인은 병으로 죽을 가능성이 젊은이들보다 훨씬 크고 유사시에 자신을 지킬 물리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가 더 크다. 혼돈의 쉬거가 굳이 연쇄 살인마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모스

 그렇다면 모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질적으로 그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태를 의미한다.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거리낌이 없어진 새로운 세태가 사람이 죽어가는 사건 현장에서 돈을 찾아 달아나는 모스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구 시대와의 접점을 유지하는 자이며 보안관인 벨이 지켜줘야 할 존재다. 즉 기성세대가 배제하기보다는 포용하고자 하는 일부 청년 세대이다. 모스는 나라를 위해 베트남전에서 헌신했던 퇴역군인이며 죽어가는 자가 찾던 물을 담아 위험한 사건 현장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휴머니즘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통제 불가능해 보이던 서부를 통제하는 데 성공했던 미국 서부 개척의 승리의 역사를 상징하는 카우보이 복장을 즐겨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카우보이 복장과 모자를 하고 있는 보안관들과 역사/가치관을 공유하는 자이다.

 모스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보안관 벨이 상징하는 영광의 과거, 그것의 쇠락,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인의 세계와 쉬거가 상징하는 불가해하고 혼돈이 가득한 새로운 세계가 뒤섞인, 현실 세계의 청년들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텍사스 중에서도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지대가 영화의 주 배경인 것은 하이브리드적인 모스의 이런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인을 위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노인의 삶

 그렇다면 벨 그 자신은 영화 내에서 어떤 행적을 보이는가? 벨은 수사를 진행해나가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면서 쉬거의 살인 흔적들을 기록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은퇴를 고민하는 그가 승진할 욕심도 없을 터인데 굳이 죽을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좋게 말하면 현명함으로, 나쁘게 말하면 공무원 특유의 소시민적 안일함으로 일을 반 박자씩 늦게 처리하면서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보스에게 고용된 사설 요원이 곧바로 쉬거와 모스가 대치하고 있는 멕시코의 도시를 찾아서 사건의 현장에 곧바로 나타나는 것과 달리, 공무원인 우리의 벨은 계속 뒤만 밟고 있다. 보안관의 권한상 어쩔 수 없다고? 그는 그보다 더 강한 권한과 능력을 가졌고 국경을 넘어서도 활동이 가능한 마약단속국과의 협력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시대가 수상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애초에 보안관이라는 직위는 현대 미국보다 훨씬 혼란했던 무법지대 서부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다. 그는 시대 탓을 하면서 스스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죽음을 부를 수 있는 불확실한 우연, 운명과의 대결을 항상 적극적으로 벌였던 모스는 결국 죽어버렸다. 반면 대결을 회피했던 벨은 목숨을 부지하고 외견상 안락한 노후를 보내며 영화의 엔딩을 장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해피엔딩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가 해냈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꿈을 통해 보여주며, 언제 쉬거 같은 이가 재출현할지 모른다는 묘한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 이것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이다.

 물론 벨이 부정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벨은 한편으로 노인의 현명함을 상징한다. 그는 보안관으로서 수십 년의 수사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그랬기 때문에 다 끝난 범죄 현장에 들어갈 때도 총을 겨누고 신중하게 접근했다. 그랬기 때문에 돈을 찾으러 온 쉬거가 안에서 벨을 쉽게 죽이지 못하고 긴장하며 대기를 했던 것이다. (뚫린 방문고리를 통해 쉬거를 비추는 노란색 차량 헤드라이트로 추론해 보았을 때 그들은 같은 시점에 있었던 것이 맞다.) 다가오는 벨의 압박에 쉬거의 눈에는 눈물마저 보일 정도로 공포에 차 있었다. 그는 동전으로 환풍기를 열어 그곳으로 탈출하였기 때문에 겨우 살 수 있었다. 축적된 지성과 현명함은 순수한 혼돈처럼 보였던 이도 잠시 긴장시킬 정도의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결과적으로 쉬거를 놓친 것은 틀림이 없다. 벨을 지성인의 대표 격이라고 생각했을 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진 후에야 날아오른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는 지식인의 무력감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뭔가 일반화될 수 있는 경향을 발견하고 나면 이미 현상은 끝나 있고 지식인들은 그 뒷정리와 요약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벨은 현명하고 안전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감수하지 않으려 했고 그 덕에 번번이 쉬거를 놓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됐든 벨의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이 미국을 살아가는 장노년층의 현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에 대하여

 이제 다시 쉬거를 바라보자. 쉬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단지 유령 같은 혼돈이라고 보기에는, 그는 너무 인간의 육체를 띠고 있다. 그는 비인간적인 혼돈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스의 총에 맞아 절뚝걸이며 힘들어하고 소독과 꿰맴이 필요한 인간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모스의 아내를 죽이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는 1차적으로는 혼돈조차 혼돈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불확실성의 진면목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쉬거라는 인물을 비인간적인 사신 정도로 보지는 않아야 한다는 힌트로 보이기도 한다. 쉬거 역시 의도를 가진 인간이며,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철학이 있는 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나 범행 현장에 리스크를 무릅쓰고 돈을 찾으러 올 정도로 물질적 추구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거기다 그가 정말로 비인간적인 무언가라면, 벨과의 대치 상황에서 눈에 고여있는 눈물은 뭐란 말인가? 그가 정말로 스릴러 영화에서 흔히 존재하는 초월적인 무언가라면 위치 추적기는 굳이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코인 토스라는 쉬거 스스로의 감정을 설득하기 위한 기제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쉬거는 결국 모스의 또 다른 형태이며 미국 사회에서 모스의 배다른 형제이자 그림자이다. 모스와 쉬거는 물질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호의를 불신하고 거래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1980년 미국 당시 기성세대에 비친 신세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구세대 미국의 가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모스와 달리 쉬거는 무차별적 살인으로 그러한 가치체계를 정면부정한다. 평범한 신세대 미국인에게 있어서 모스적인 면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쉬거적인 면도 일부 존재할 것인데, 그러한 면들을 두 인물로 쪼개서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노인의 시선에서 그려진 것이기 때문에 쉬거는 노년층이 신세대에게 가지는 두려움이 꿈속에서(영화가 꿈에서 깬 노인의 회상일지 누가 아는가?) 극단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모스의 죽음과 쉬거의 생존은 미국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보는 감독의 시선이 담긴 것이지만, 그러한 쉬거조차 교통사고라는 혼돈에 타격을 입는 것 역시 마냥 멸망을 예언하고 있지만은 않다. 심지어 영화의 말미에 (나중에 돈을 나눠가지는 것 가지고 친구와 좀 티격거리기는 하지만) 어린아이가 대가 없이 자신의 셔츠를 벗어주려 하는 호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조각이 보이기도 한다. 이는 기성세대가 노인의 편견으로 신세대를 마냥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제목 얘기를 하고 마치려고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엄밀히 말하면 오역이다. 원제인 'No country for old men'은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인데,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면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이다. 여기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이고, 따라서 노인을 위한 나라로 가겠다는 것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의 플롯이다. 

 하지만 영화를 곱씹어보면서 오히려 한국어 원제가 초월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로 번역을 했으면 앞에 결국 배경인 '미국이'가 자동으로 연상됐을 것이고 미국 사회의 특수한 사회상을 반영한 얘기로 먼저 머릿속에서 프레이밍 한 후에 영화를 보게 됐을 것 같다. 그렇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을 보고 영화를 볼 때는 이것이 감독이 주장하는 인류 보편의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고 보게 됐다. 그리고 여러 배경을 찾아본 지금도 이것이 인류 보편의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히 틀린 해석을 유도하게 된 것도 아닌 것 같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노인이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대한 일반화가 지금까지도 통하는 쉬운 시대이다. 전근대 농경 사회에서는 노인은 지혜로운 인간이자 자연재해 등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귀한 인적 자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는 노인을 이미 철 지난 과거의 사례만을 가지고 일반화한 원칙을 고수하며,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낭만화되고 이상화된 곳이며, 그곳을 상상하며 도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거와 모스가 살아가는 세상을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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