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젊은 안무가가 체화한 '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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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두 번째로 개최된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공연 〈HIP合〉에 80년대생 세 안무가, 이재영, 지경민, 정철인이 참여했다. 지난해 김보람과 김설진, 이경은의 참여로 기획 타이틀처럼 ‘힙’하고 트랜디한 무대로 자리매김 한 이 기획은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의 “’힙’한 것의 합”의 의미 외에도 힙합 문화와 춤을 그 자체로 소재이자 협업 대상으로 제시하며 무용에 친숙하지 않은 대중 관객들의 현대무용 유입에 기여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올 해 참여한 이재영, 지경민, 정철인 역시 힙합춤이 체화된 무용수이자 안무가들로, 각자의 창작적 뿌리에서 뻗어 나온 현대무용으로 개성 있는 ‘힙’함을 선사했다.
이재영의 〈메커니즘〉은 손과 팔에서 시작되는 분절된 움직임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이는 힙합의 터팅tutting, 즉 관절을 중심으로 손, 손가락, 팔 등을 이용해 각을 만드는 동작들을 연상시킨다. 힙합 터팅이 주로 90도 각을 만들어내는 동작들의 연속으로써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 발견되는 자세들을 형상화 하듯 평면적으로 발전된다면, 이재영의 안무는 몸을 에워싼 공간을 인지하며 각 관절들의 움직임을 몸 전체에 입체적으로 확장한다. 이렇게 확보된 몸의 메커니즘은, 몸들의 집합이 이루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나아간다. 멜로디 없이 비트의 강약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분절된 움직임에 청각적 자극을 더하고, 속도를 내면서도 절제된 움직임이 하나의 안무적 세계관을 구성한다. 작품의 후반부 시계추 아래 원을 이루고 선 무용수들이 기계적 움직임을 멈추고 사방으로 발산하는 찰나의 폭발적 움직임은 시스템의 균열과 새로운 메커니즘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작품의 주제를 뚜렷한 안무 방법론과 세련된 연출로 풀어내는 이재영은 이번 작품에서 역시 기대만큼의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였다.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라는 주제는 흰 플로어 위에 검은 타이즈를 입은 무용수들(권혁, 김소연, 김혜진, 변혜림, 양진영, 이재영), 조명의 변화로 재구성되는 무대, 그리고 각 관절들로부터 발생해 전신으로 연결되는 움직임으로 시각화되며 이재영표 무용의 뚜렷한 세계관을 증명했다. 현대무용 이전부터 그의 몸에 체화된 힙합춤은 그의 안무에 세련미와 ‘힙’함을 더한다. 이번 작품은 특히 그의 뿌리 중 하나인 힙합을 자원으로 하여 현대무용의 자유와 해방감을 유영하는 이재영 안무의 진가를 드러냈다.
지경민의 〈파도〉는 무대 위에 이야기보따리를 훅 던져 풀어놓은 듯, 속도감 있는 전개와 다채로운 이미지들로 관객들을 홀리며 순식간에 공연장을 따뜻한 꿈 속 공간으로 만든다. 아홉 명의 무용수들(남진현, 류견진, 배효섭, 안현민, 오진민, 이경구, 이연주, 임성은, 장소린)은 춤이라는 자유에 몸을 맡긴 듯 무대 위를 누빈다. 특정 춤 스타일로의 제한을 거부하며 흘러나오는 음악의 멜로디와 가사에 충실히, 다양한 스타일을 아우르며 춤추는 무용수들이 선사하는 재기 발랄한 순간들에 이끌려가다 보면 관객들은 어느새 종착지인 바닷속에 들어와 있다.
카혼 등의 연주와 음악을 통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파도 소리, 바다를 상징하는 영상 이미지,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공간의 위 아래를 굽이굽이 오가는 안무 등 시청각을 충만하게 채우는 이 작품은 모든 걸 품어내는 바다와 같이 따뜻한 감성으로 관객을 안는다. 고블린파티의 대부분의 작업들이 그렇듯, 지경민의 〈파도〉는 유머와 휴머니즘을 추구하며 경계 없는 표현력을 기반으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난해함을 예술적 무기로, 관객의 사고에 이질적 자극을 주고자 하는 것이 보통의 현대무용이라면, 지경민은 편안함 속에서 관객의 지적 해방을 가능케하는 특별한 현대무용가 일 테다.
정철인의 〈비보호〉는 ‘비보호’ 상태에서의 질서와 무질서, 충돌, 혼돈 등의 합을 무대 위에 펼친다. 특정 신호에 따른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은 오직 개개인의 순간적인 선택들에 의해 점철된다. 작품은 7명의 무용수(김윤현, 류지수, 문경재, 이대호, 임현준, 주영상, 정철인) 개개인들의 움직임, 교차 지점에서의 자발적 선택, 선택에 의한 질서와 혼란 등 다양한 변수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마치 보호라는 명목 하에 규칙 안에 가두어졌던 개개인들이 비보호의 세계에서 일탈을 맛보듯, 자유롭게 무대 위를 유영한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전동 킥보드와 롱보드를 탄 비보호 길 위 두 젊음의 스릴과 위험의 경계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다. 특별 출연한 롱보더 유지UZ는 전동 킥보드 위의 무용수 문경재와 색다른 합을 맞춘다. 무대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와 정적, 찰나의 스침으로 피해간 충돌, 혈기 왕성한 젊음들의 경계와 도발이 긴장과 쾌감을 동시에 자극한다. 관객들은 실제로 길 위에서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전동 킥보드를 무대 위로 들여오기 위해 치밀한 안무적 계획과 동선의 합을 맞췄을 거라는 믿음에 기대어 이 아슬아슬한 불예측의 상황들을 숨죽여 지켜보게 된다.
끝내 생명력을 잃은 젊은이의 몸이 무기력하게 전시되는 마지막 장면은 작품을 끌고 온 도발적 실험과 역동적 쾌감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무하다. 저돌적으로 전개해 나가던 작품의 주제와 흐름에 살짝 어긋나는 듯 마무리 되는 결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안무의 제한된 틀을 깨는 정철인의 기발한 상상과 치밀한 합 속에서 자유로운 일탈을 춤추는 무용수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다.
‘힙합’이라는 매력적인 장르를 앞세워 ‘힙’한 세 안무가를 한 데 모은 이 기획공연은 예술적 완성도 뿐만 아니라 대중적 감성과 트랜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최근의 국립현대무용단의 운영 방향성을 반영한다. 다만 단순히 세 작품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것을 넘어 (물론 세 안무가의 신작 세 편을 큐레이팅 하는 것이 안무가나 기획주체에게는 수월한 방법일테다) 시너지를 발현할 수 있는 진정한 ‘합’의 무대로 발전될 수 있는 〈HIP合〉 만의 부가적 기획력기 가미되기를 기대해본다.
2022.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