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음식과 손님치레

by 라이테

아버지는 4남매의 막내이자 2대 독자였다. 외며느리인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5년 정도로 일찍 끝났는데 할머니의 일손도 함께 사라졌다.

어머니 나이 스물아홉에 막냇동생을 낳고 많이 우셨다고 한다. 친정어머니를 일찍 여의셨으니 산바라지해 줄 손이 없었다. 아기를 낳고 병실에 누워계시는데 다른 병실에서 풀풀 풍겨 나오는 미역국 냄새에 쫄쫄 굶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몹시 서러우셨다고 한다. 과부의 금지옥엽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그때까지 밥 한 번 해보신 적 없었기에 미역국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산모를 굶긴 아버지는 ‘융통성 없고 인정 없는 남편’으로 평생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시집살이 종료는 곧 독박 가사와 육아 개시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동서 없는 어머니의 명절 준비는 더욱 고달팠다.

설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흰 쌀을 불려 가래떡을 먼저 뽑았다. 불린 쌀을 빨간 대야에 담아 삼베 보자기를 덮어 툇마루에 내놓았다. 그러면 아버지가 삐걱삐걱 소리 나는 자전거 뒷자리에 단단히 묶어 고정했다. 앞자리에 우리 중 하나를 태워 방앗간까지 걸어가셨다. 방앗간에 줄줄이 대기하던 떡쌀 대야들 맨 끝에 싣고 온 것을 풀어 놓았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시고 그때부터 평상에 엉덩이 한쪽을 살며시 들이밀고 앉아 가래떡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덜컹거리는 기계 소리와 떡판 위에 쫙쫙 바가지 물이 끼얹어지는 소리, 기계를 멈추는 레버 소리와 소음 때문에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시루떡인지 가래떡인지 쌀의 용도를 알리는 걸쭉하고 투박한 사투리 사이를 뿌옇게 오른 수증기가 빈틈없이 메워 나갔다. 맨 앞 불린 쌀이 한 개씩 사라질 때마다 가져온 대야를 한 칸씩 앞으로 옮겨 놓아야 했다. 몇 시간의 지루함을 견뎌야 나오는 가래떡. 삯을 치르고 방앗간 안집 쪽마루에 대야를 놓아달라고 요청했다.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다시 자전거로 뜨거운 가래떡을 싣고 오셨다. 어머니는 종지에 참기름 반 물 반을 섞어놓고 한 가닥씩 붙잡고 참기름을 발라 대나무 소쿠리에 펼쳐놓았다. 어린 우리는 엄마 젖무덤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하면서 고소한 가래떡을 길게 붙잡고 고개를 젖혀 베어 물었다. 그렇게 바구니에 펼쳐놓은 가래떡이 썰기에 적당히 굳으면 도마에 놓고 썰어 떡국 용도로 만들었다. 초저녁부터 한잠 자다 설핏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깨기도 했는데 몇 시인지도 모를 그때까지 어머니는 계속 떡을 손질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 손가락 안쪽 마디가 붉히도록 칼질이 이어졌다.

명절에 빠질 수 없는 게 수정과와 식혜였다. 미리 보리 싹을 틔워 엿기름을 건조해 두었다가 식혜를 만들었다. 편강이 들어간 어머니 식혜는 다른 집 식혜에 비해서 유난히 맑고 뽀얘서 비법을 자주 물었던 명품이었다. 별난 비결 없이 똑같은 과정을 거쳐 식혜가 만들어지는데 투명 유리그릇에 담긴 어머니 식혜는 달랐다. 편강이 한 개씩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입으로 들어가 씹히면 화들짝 놀라서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던 어린 얼굴이 식혜 물 위로 동동 떴다.

수정과는 아릿하고 알싸한 계피 향이 한몫했다. 수정과 그릇에 통째 담겨있는 곶감과 잣을 꺼내 먹는 것은 또 다른 별미였다. 쫀득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계피 향이 배어 매콤한 곶감을 먹고 나면 입안에 끈끈함이 남았다. 두세 알 띄웠던 잣의 고소함으로 뒷맛을 달랬다. 알싸하고 맵싸한 계피의 잔향이 어우러진 수정과를 뜨끈한 아랫목에서 한 그릇 마시고 나면 서늘하고 싸한 기운이 대장 끝까지 내려가는 느낌을 받아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설 며칠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 부스개도 있었다. 사각 반죽 편은 채반에 널어놓아도 겨울 햇볕으로는 잘 마르지 않았다. 그럴 땐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행주로 깨끗이 닦은 후 거기에 널어놓는데 이걸 어린 손들이 오며 가며 가만두지 않았다. 어느새 양이 3할은 줄어든 것 같은데 때론 어머니의 손이 등으로 날아오기도 했다.

캐러멜처럼 쫀득하게 마른 반죽 편을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고 조청을 발라 튀밥이 가득 담긴 대야에 넣어 둥글리면 부스개로 완성된다. 떡국이나 식혜가 우리 집 서민 음식이라면 부스개는 궁중음식쯤 되었다. 튀밥을 입은 우아한 귀부인 같은 자태와 코끝을 통해 스미는 고소한 냄새가 겉으로 번지는 조청의 달콤한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침이 절로 흘렀다. 부스개가 다 만들어지면 이때부터 어머니의 단속이 시작되었다. 만드는 과정과 기간이 만만치 않다 보니 어린 손들이 들락날락 손님치레하기 전에 다 먹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어머니만의 저장 공간에 숨겨두셨는데 주로 장독대의 가장 큰 항아리였다. 어린 우리도 어디쯤 숨어있을지 짐작은 되었지만, 그 수고를 봐서 알기에 다른 건 몰라도 부스개는 아무리 유혹이 강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우리 집만의 음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찹쌀 부꾸미였다.

해방둥이인 어머니는 자라면서 쌀이 귀해 보리밥을 많이 드셨다. 그래서 시집오신 후에는 잡곡밥을 하시지 않았고 쌀밥만 고집하셨다. 그만큼 쌀, 특히 찹쌀 음식을 좋아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부꾸미였다.

찹쌀을 고운 가루 내어서 소금과 식용 색소(분홍, 노랑, 연두)를 넣고 반죽한 후에 암반에 얇게 밀어서 마름모 모양으로 잘랐다. 거기에 추석에는 쑥이나 쑥갓잎을 올리고 설에는 달걀지단이나 실고추, 잣이나 검정깨를 고명으로 얹어 그대로 기름에 지졌다. 또 둥글게 밀어낸 그대로 기름에 지진 후 흰색, 분홍, 노랑, 연두 지짐을 켜켜이 쌓은 후 뜨거울 때 돌돌 말아서 모양을 잡았다. 식은 후 썰어내면 단면이 색색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맛깔스러운 부꾸미가 되었다.


외며느리이며 손이 큰 어머니는 먹성 좋은 우리 남매의 호시탐탐 눈독을 막아내면서 손님치레 음식을 명절 훨씬 전부터 혼자 준비하셨다. 도울 일손이 없으므로 양을 줄이거나 가짓수를 줄이면 좋으련만 특별식을 포함한 일반식 명절 음식을 날밤 지새우며 해내셨다. 그 속내에는 이런 말이 어머니의 버팀목이 되어 지지하고 있었는데 그 말이 어머니 일손을 달래기에 충분했나 싶다.

“우리 외숙모 음식을 먹어야 명절을 쇤 것 같다니까.”

알록달록 색동한복에 털배자 조끼를 겹쳐 입고 색동주머니를 달랑달랑 차고 꽃신으로 온 동네를 누비던 우리들의 설 명절.

마지막 사준 색동한복이 큰 딸인 언니에게 훌쩍 작아지고 원아동복 옷맵시가 제법 날 만큼 자라면서 차례대로 언니 뒤를 이어 나와 동생이 이어갔다. 열 살 넘어서부터 우리도 어머니의 일손을 덜어주기 시작했다.

“우린 왜 큰엄마, 작은엄마도 없는 건데.”

손님치레에 지쳐서 없는 백모, 숙모를 원망하며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었다.

설 명절은 내 기억에 색동한복 입던 때까지 마냥 신났었고 열 살 이후에는 친척 집으로 이동하는 즐거움도 없이 붙박이가 되어 일손 보태느라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세뱃돈 받은 기쁨과 손님치레 고단함이 동량으로 양팔 저울의 수평을 이루었다.

철없던 시절이 다 지났고 그때 우리 나이보다 더 장성한 자녀들에게는 명절 음식 준비에 일손을 보태라 하지 않는다. 찾아오던 고종사촌들도 이제는 각자 집에서 자손 맞이하느라 바쁘다. 명절 전부터 몸살감기 올 때 같은 그런 찌뿌듯한 버석거림이 있다. 아마도 어린 시절 풀어내지 못한 명절의 버거움이 여전히 짓누르고 있기에 그런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