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갑자기 바뀐 날씨에 한동안 입지 않았던 옷을 꺼내 입고 나왔더니, 이전까지는 보이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눈들이 신경 쓰입니다. 색이나 모양이나 어쩐지 지금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것만 같아 자꾸만 나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을 몇 번이고 보게 됩니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온전한 내가 되기도, 군중 속에 들어가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1821~1867)는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 군중이라는 시에서 군중 속에 잠기는 행위, 나아가 자기 자신도 남도 될 수 있는 행위를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재능이 아닌,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아니고서야 군중 속에 잠겨 ‘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래도 보들레르가 말한 사색에 잠긴 고독한 산책자처럼 되는 재능을 발휘하기에, 현대 사회는 너무 시각적이고, 너무 빠르니까요.
‘나’를 잃어버리는 일은 ‘나’를 갖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교환이 일상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누구도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 온전하게 혼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온전한 ‘나’를 갖는다는 것은 사실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생각됩니다.
우리는 결국 나我를 갖지 못한 채, 나 아님非我과 나 아님非我의 사이를 오가면서 미아迷我의 상태로, 관계와 관계 사이를 떠다니기를 반복할 뿐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특히 전통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후 또 다른 사회로 옮겨가고 있는 와중인,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상으로 볼 때, 인간이 ‘나’를 갖는 문제에 가장 예민했던 것은 특히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들이었습니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그가 쓰는 언어가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지요. ‘나’의 언어 속에 어떻게 온전한 ‘자기’가 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적어도 작가에게는 필사적인 문제였습니다.
서가를 둘러보다 이미 몇 번이나 책꽂이에서 꺼냈던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1882~1941)의 자기만의 방을 또 다시 꺼내 듭니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픽션(소설)이라는 제목으로 요청받아 여러 대학에서 한 강연들을 모아 놓은 강연집입니다.
여러 차례 행했던 강연들을 모은 책인 만큼, 논리나 체계의 밀도가 일정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에 글쓰기를 통해 작가로서 필사적으로 자기를 지켜내고자 했던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버지니아 울프만큼 필사적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 글을 썼던 작가를 달리 또 찾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 당연하게 ‘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시대에, 그 당연한 것을 가지고 지켜내기 위해 여성으로서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조용히 귀 기울여 경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힘이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이 작가의 마음에서 완전하고 총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거스르는 것들이 도처에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적 환경이 그것에 적대적이지요. 개들이 짖을 것이고 사람들이 방해할 것이며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은 악화될 겁니다. 게다가 이 모든 곤경을 가중시키고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세상의 악명 높은 무관심입니다. (중략) 여성들에게 이러한 시련은 무한히 가중된다고 나는 텅 빈 서가를 보며 생각했지요. 우선 조용한 방이나 방음 장치가 된 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6, 83쪽.
버지니아 울프에 따르면, 작가의 마음속에 떠오른 위대한 작품에 대한 영감은 언제든 글로 옮겨질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온전히 혼자가 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려고만 들면, 이따금 개가 짖는 소리와 사람들이 방해하고 또한 돈에 대한 압박과 건강의 악화,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이 그 영감을 글로 옮기는 것을 막습니다. 게다가 여성 작가에게 있어서 그러한 방해와 시련은 무한히 가중되는 것이고, 울프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겠지요.
누구나 예술적 창작의 영감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누구나 그것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질적인 조건 때문입니다. 사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작가됨을 막는 방해들은 어느 것이나 거창한 것이기보다는 꽤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고백이야말로 어떤 작가들에게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이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힘들었던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성공하지 못한 작가들의 고백은 잊혀 버립니다. 작가가 위대한 글쓰기가 아니라 돈이나 건강의 결핍, 무관심에 대한 공포를 고백하는 것이 촌스럽거나 작가답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시대의 밀폐된 공기가 그것을 쉽게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요.
그가 글쓰기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방’이 예술적 능력이나 글쓰기의 천재성 같은 메타포가 아니라 적당히 넓고 잘 잠기는 열쇠 장치가 되어 있는, 물질적인 진짜 ‘방’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버지니아 울프의 싸움이 단지 상징적인 투쟁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울프의 시대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낭만도 아니고,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요.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낭만적인 시를 쓸 수 있었던 남성 작가들의 상황과는 다릅니다. 그의 글쓰기의 영도는 강요된 낭만성이 아닌 겨우 몇 평 되지 않는 방이 주는 현실적 안정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물질적인 공간에서 시작된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그 물질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 내지는 ‘문학’의 메타포로 확장되어야 했을 겁니다. 글을 쓸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야말로 사유의 공간의 전제 조건인 셈이지요. 작가의 예술적 사유는 그 방과, 그의 서가와 밀착되어 형성되고 확장되는 것이니까요.
남미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1899~1986)는 무려 ‘무한의 도서관’을 자신의 창작 공간으로 삼았습니다. 식민지의 작가였던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연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는 자유로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배경은 물질적인 방을 넘어서는 무한한 사유의 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방과 서가를 갖지 못했던, 울프나 그 이전 시대의 여성 작가에게 있어서 그러한 ‘작가’나 ‘방’에 대한 메타포조차 사치였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울프에 따르면, 당시는 남성 작가들이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소네트를 전유하고 있던 시대였고, 시는 여전히 소설보다 가치가 높았습니다. 제인 오스틴 Jane Austen(1775~1817)부터 조지 엘리엇 George Eliot(1819~1880) 등 영국의 여성 작가들이 ‘시’가 아니라 심지어 여성이라는 이름을 감추고 ‘소설’을 택했던 것은 여성으로서 받을 수밖에 없었던 방해 때문에, 필사적으로 좀 더 유연한 형식인 허구적인 소설 창작에 매달린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성 작가들은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해 온갖 물질적인 조건들과 악전고투를 하면서, 이전까지는 텅 비어 있던 서가를 차곡차곡 채워나갔습니다. 울프에게는 필사적으로 얻어내고자 했던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와 습성’은 이제 그를 읽는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500파운드라는 돈이 얼마쯤 되는 것인지, 버지니아 울프가 꿈꾸었던 창작실이 얼마나 되는 크기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누군가 고투해왔던 물질적 조건들이 이후의 작가들에게는 작가의 낭만성을 대체하는 글 쓰는 작가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작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겁니다. 문학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보편에 대한 공감의 가치를 통해 우리의 감정에 친밀하게 다가오는 까닭이지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본령입니다.
공동의 거실에 머물렀던 우리 모두는 잠시 그 거실에서 나와 ‘자기만의 방’에서 읽고 쓰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나’가 되는 일이자, ‘나’의 언어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주는 울림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