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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룩 Mar 10. 2020

희망 있음과 희망 없음 사이, 그곳에 존재하는 삶

루쉰의 첫 번째 소설집 "납함(吶喊)"

물론, 인간의 삶 속에 ‘희망’이나 ‘절망’이 본래부터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어디까지나 ‘희망’이나 ‘절망’은 언제나 개개의 사람들이 다가올 미래에 대해 가지는 태도 혹은 지향과 관계되는 것이니까요. 

사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던 삶을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되도록 만드는 ‘희망’이나,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절망’의 상태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는 식으로 속 편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서 희망이든 절망의 요소를 진단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정한 사람들에게도, 다가오는 삶은 언제나 기대하는 차원을 넘어서 더 답답하고,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매일매일 무언가를 위해서 인지도 모르게 바쁘게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습니다. 또, 가끔은 가는 길을 멈추고 길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곰곰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두 개의 눈이 머리 앞에 달려 있어서, 어디론가 달려가면서도 어느 방향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지 조망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기에 겪는 당연한 비극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어딘가 정해진 트랙을 달려 나가면서도, 자신이 맞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달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알 수는 없는 것처럼. 축구선수가 공을 받고 발로 그것을 차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수도 없이 연습해왔던 훌륭한 연결 동작으로 공을 찼는지 알 수는 없는 것처럼.

일상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생활의 영역과 우리가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삶의 방향성을 조망하는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종종, 걸음을 멈추고 내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맞는 방식으로 걷고 있는가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작은 방구석에 놓여 있는 화분 속 식물은 빛과 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자신이 담고 있었던 모든 가능성을 발휘하여, 그 작은 몸을 애써 새로운 싹을 틔웁니다. 자연스러운 생명의 작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신에 대한 증명과 타인과의 경쟁으로 점철된 하루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모두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러다, 저녁이 되어, 잠시 치열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것에는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때로는 그 ‘희망 없음’에 절망하기도 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삶의 궤도에서 잠시 내려와 있는 시간에, 우리가 ‘인생론’이나 ‘자기계발론’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하는 불안감 때문일 것입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처음이고 일회적이기 때문에, 내가 향해가고 있는 길이 의미 있는 길인지, 그 속에 ‘희망’이 있는지 하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번잡한 술자리에서 큰소리로 짐짓,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의 눈동자에 어려 있는 확신은, 사실은 자신의 삶이 맞게 흘러가고 있는지 너무나 불안해서, 큰 목소리로 몇 번을 반복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입니다. 우리의 말은 쉽게 ‘희망’을 말할 수 있지만, 그 말속에 담긴 ‘희망’이라는 논리나 수사만이 그것이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에 불과하니까요.


우리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또 우리의 사회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우리가 조망하는 삶의 이상은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펼쳐져 지평선을 만들고, 이상을 말하는 우리의 말과 글은 논리에 따라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삶의 방향성을 향해 여러 가지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을 만듭니다.

중세 이후 신의 언어를 대신하는 인간의 의미와 가치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그러했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군중’ 속에서 그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군중’ 바깥에 존재하는 현대인들에 대해 조감하는 시선을 갖고자 했던 보들레르 같은, 파리의 산책자들의 불가능한 꿈이 그러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이상이나 희망을 말했던 많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아마도 중국 소설가 루쉰魯迅(1881~1936)만큼, ‘희망’에 대해 조심스럽고도 냉소적인 견해를 가졌던 작가는 또 없을 것입니다. 

결연한 태도로 확신에 찬 큰 목소리로, 절망적인 상황과 그 속에 존재하는 극적인 ‘희망’을 강조하며 큰 목소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연스레 마음이 기울고 그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집니다. 반면, 차분한 태도와 떨리는 목소리로 만연한 ‘절망’과 ‘희망’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과는 차를 한 잔 나누면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의 근거에 대해서 대화하고 싶어집니다.

루쉰은 바로 결코 섣부른 절망이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그러한 작가입니다. 오랜만에 너무나 유명한 루쉰의 소설집 납함의 서문 한 대목을 작게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루쉰, 김시준 역, <제 1소설집 <<납함(吶喊)>>의 자서(自序)>, <<루쉰소설전집>>,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8-9쪽.


‘쇠로 된 방에 대한 비유’로 알려진 자기가 쓴 이 서문의 한 대목에서 루쉰은 ‘희망’이나 ‘희망’을 말하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가장 잘 알려줍니다. 루쉰은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던 중국인들의 몸이 아니라 정신을 새롭게 바꾸기 위해서 문학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생각했던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잡지 신생新生이라는 야심 찬 기획을 준비하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그 기획은 결국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혀 아예 좌초되어 버렸습니다. 처음에 의기투합했던 세 명의 사람마저 장래의 꿈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게 되었죠. 그야말로 적막 그 자체였습니다. 그곳에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상의 삶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소리 높여 말하여, 희망도 절망도 아니었을 사람들을 깨워, 오히려 더 깊은 절망을 경험하도록 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루쉰은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사회적 이상을 말하거나 계몽을 말하는 정치가들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고민이었겠죠.

그럼에도, 루쉰은 자신의 고민에 대한 친구의 발언을 듣고, 희망은 미래를 향해 있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확신이 타인의 희망을 꺾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첫 소설인 광인일기 狂人日記(1918)를 완성했던 것입니다.

이 소설도 그렇지만, 이후에 발표된 루쉰의 소설들은 대부분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의 소박한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정치가든 소설가든 누구나 희망이나 절망을 입에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속에 담긴 그것이 아직 그러한 적막과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작가는 그가 유일합니다. 분명 그는 ‘희망’을 말하기 망설이고 있는 작가이며, 그 망설임은 작가에 대한 신뢰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당시 여느 중국인들이 그러하듯, ‘정신적 승리’로 살아가다 나름의 이유로 대인의 댁에, 또 나름의 이유로 혁명당에 가담한 아큐나, 주점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소년에게 굳이 문자 쓰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쿵이지가 발견한 희망은 모두 각자 나름의 ‘희망’을 구성하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란 타인이 소리 높여 부르짖는 희망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희망 없음에서 희망 있음을 발견해내는 소박한 움직임 속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오늘만큼은 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말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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