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에세이 1부
창밖으로 비가 내리던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온 나는 소파에 몸을 던진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 쏟아지는 메시지에 답하고,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정작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피곤하다는 감각만이 온몸을 짓눌렀죠.
책장 한쪽에 꽂혀 있던 낡은 노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학 시절, 좋아하던 시를 베껴 쓰던 노트였어요.
무심코 펼쳐본 페이지에는 서툰 손글씨로 적힌 김춘수의 시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나는 나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몸짓'처럼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펜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시를 다시 한 번 베껴 쓰기 시작했죠.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쓰는 동안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한 거예요. 펜 끝에서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소리, 페이지 넘기는 바스락거림, 그리고 빗소리.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필사와 다시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지하철에서도 뉴스피드를 스크롤하고, 점심시간에도 유튜브 영상을 배속으로 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지용 원장의 말처럼, 정보 과잉에 시달리는 우리 뇌는 쉽게 지쳐버리곤 하죠.
독서마저도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 '속독법 마스터하기' 같은 목표로 가득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필사는 어쩌면 가장 느리고, 가장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 1분이면 충분한데, 그걸 베껴 쓰려면 10분도 넘게 걸리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의도된 비효율'이 우리에게 진정한 선물을 안겨줍니다.
세상의 속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당신을 스쳐 지나갔던 문장들을 오롯이 내 손으로 붙잡는 시간.
이것은 당신의 뇌와 마음에 쉼을 주는 작은 반역이자, 조용한 혁명입니다.
작가 김시현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SNS 시대에 필사가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는 '텍스트 힙(Text Hip)'으로 자리 잡았다고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어떤 책을 고르는지, 그 책의 어떤 문장을 특별히 아껴 적는지, 당신만의 손글씨는 어떤 모양인지. 이 모든 것이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가장 진솔한 브랜딩이 됩니다.
명품 가방이나 비싼 카페 인증샷이 아니라, 조용한 밤 책상 앞에서 펜을 들고 있는 당신의 모습.
그 안에 담긴 깊이와 진정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디지털의 피로감 속에서 섬세한 손의 감각을 되찾고 싶은 갈망. 그것이 우리를 필사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아요.
김시현 작가는 필사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책의 내용을 쓰는 것이지만, 결국 자신을 쓰는 행위"라고요.
고도로 농축된 작가의 언어를 한 자 한 자 눌러 쓰는 동안, 우리는 오롯이 문장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죠.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명상의 시간.
필사는 그런 경험을 선물합니다.
저도 처음 필사를 시작했을 때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문장이, 한 글자씩 쓰다 보니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아, 작가가 이런 의미로 이 단어를 선택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손끝에서 느껴졌습니다.
책문화 전문가 최은숙 대표는 아름다운 비유를 들려줍니다. 눈으로만 읽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풍경을 스쳐 지나가는 것'에 가깝다고요. 반면 필사는 '제주 올레길을 한 발 한 발 걷는 것'과 같습니다.
한 글자씩 눌러 쓰는 행위는 문장이라는 길을 온몸으로 체화하며 걷는 경험입니다.
문장의 구조와 리듬을 몸으로 느끼며, 그 의미를 훨씬 더 깊이, 온전하게 이해하게 되는 거죠.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 놓쳤을 작은 들꽃, 바람의 향기, 발밑의 흙길 감촉. 필사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루의 소란을 마감하는 시간, 필사는 고요한 항구에 '안전하게 닻을 내리는 행위'와 같다고 최은숙 대표는 말합니다. 폭풍우 같던 하루를 보낸 뒤, 필사를 통해 '나'라는 배를 잠시 정박시키고 고요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 이 짧은 정박의 시간이 내일의 항해를 떠날 수 있는 단단한 힘이 되어줍니다.
저는 요즘 잠들기 전 15분을 필사 시간으로 정해두었어요. 하루 종일 정신없이 달려온 나를 조용히 다독이는 시간이랄까요.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드는 순간, '이제 하루를 마무리해도 괜찮아'라는 신호가 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필사의 놀라운 효과는 '손은 제2의 뇌'라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김시현 작가와 김지용 원장의 설명을 종합하면, 필사처럼 손을 정교하게 사용하는 행위는 뇌의 전두엽을 활성화시킨다고 해요.
전두엽은 공감, 판단력, 통찰력처럼 우리를 더 깊이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고차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즉, 필사는 단순히 손을 움직이는 것을 넘어, 우리 뇌의 가장 정교한 부분을 훈련시키는 행위인 셈이죠.
손을 섬세하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문장에 몰입하게 됩니다.
바로 이 몰입의 과정이 스트레스 가득한 잡념의 고리를 끊어주고, 뇌에 진정한 휴식을 선물합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짜증나는 일, 내일 해야 할 일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 돌 때, 필사는 그 소용돌이를 멈춰 세웁니다.
'ㄱ', 'ㅏ', 'ㅁ', 'ㅅ', 'ㅏ'. 한 글자씩 쓰는 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잡념은 사라지고 문장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고요한 공간에서 진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죠.
김지용 원장은 필사가 생각을 끊어주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김시현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예요.
필사를 하다 보면 문장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내 마음이 이런 거였어' 하는 깨달음의 순간들.
그 순간들이 쌓이면서 '내가 나를 안다'는 자신감과 정서적 안정감을 얻게 됩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있어요. 어느 날 이상의 시를 필사하다가 "슬프다는 말은 슬프다는 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구절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어요. 내가 그동안 슬픔을 '괜찮아', '별거 아니야'로 덮어버렸다는 걸요. 그날 밤 노트에 처음으로 '나는 슬프다'라고 솔직하게 써 내려갔습니다.
필사는 문장 구조를 익혀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김시현 작가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요.
최은숙 대표는 수학자 허준이 교수의 통찰을 인용하며, 진정한 창의성은 '일상의 큰 빈칸'이 있을 때만 발현된다고 말합니다. 효율만을 좇는 우리는 삶의 모든 빈칸을 없애버렸죠. 필사는 바로 그 필수적인 여백, 새로운 생각이 뿌리내릴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입니다.
다양한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같은 하늘을 보더라도 윤동주는 '별 헤는 밤'으로, 김소월은 '산유화'로 표현했죠. 이렇게 다양한 시선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사고도 확장됩니다.
김지용 원장이 강조하는 것이 있어요.
매일의 작은 실천으로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것, 즉 지연만족을 경험하면 자존감이 향상된다고요.
하루 15분, 단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시현 작가의 표현대로, 정신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일상이 건강해지는 거예요.
요즘 저는 필사 노트에 날짜 도장을 찍고 있어요.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도장이 빼곡히 찍힌 노트를 보면서 뿌듯함이 밀려오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저처럼 복잡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
그렇다면 오늘 밤, 단 15분만 시간을 내보는 건 어떨까요?
책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꺼내고, 펜을 들고, 단 한 문장만 천천히 베껴 써보세요.
그 문장이 당신의 손끝을 거쳐 종이 위에 새겨지는 순간, 뭔가 달라지기 시작할 거예요.
다음 이야기에서는 당신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함께 나눠볼게요.
어떤 책으로 시작하면 좋을지, 어떤 도구가 필요한지, 그리고 이 좋은 습관을 어떻게 평생의 친구로 만들 수 있는지.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노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