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생태유학을 마무리하는 초4의 자세
지난 주말 자려고 누웠는데 초4 경진이 물었습니다. "아빠는 여기 와서 지내는 동안 재미있었던 일이 뭐야?"라고 말이죠. 저는 흥이 많은 편이 아니라 웃음이 많지가 않습니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라든지 기본 얼굴 표정도 험상궂은 편이라 아이가 화났냐고 오해할 때도 많죠. 그래도 올해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설피마을에서 생태유학 산골살이를 하면서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신기한 경험이기도 하고요. 도시에 살면서 볼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새를 매일 같이 만나고, 너구리 꼬리를 가진 길고양이가 밥을 구걸하러 오고, 야생동물 관찰 카메라를 설치해 고라니와 노루를 보고, 운전하는 자동차로 오소리가 뛰어드는 이런 경험이 정말 재미있고 놀랍습니다.
물어봤으니 답을 할 차례죠. 가장 숨 막혔던 순간인 '오소리 로드킬할 뻔했던 사건'을 꼽았죠. 그랬더니 경진이 대뜸 대꾸합니다. "그건 재미있었던 일이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동물을 죽일 뻔했던 게 재미는 아니죠. 그래서 "야생동물을 만나고, 새소리를 듣고, 자연을 관찰하는 게 재미있었어"라고 답을 했습니다만... 사실 가장 큰 재미는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거죠. 친구들과 친하게 어울리면서 함께 웃고 떠들고 움직이고 뭔가를 같이 만들어내는 그런 모습이요. "아빠 오늘은~"이라며 하루를 지낸 이야기를 자랑하고 신기한 걸 발견했다면서 보러 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장면장면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대한민국 초등4학년 아빠 중에 저처럼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함께 모험을 떠나는 아빠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와 함께 단둘이 떠난 산골생태유학은 참 많은 재미를 선사했습니다. 물론 도시에서 누리던 왁자함과 편리함은 산골에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설피마을이 주는 엄청난 힐링은 도시의 이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자연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흔치 않은 그런 기회를 잡은 저는 행운아입니다.
주말에 서울에 일이 있어 잠시 과천 본가에 왔는데요. 과천도 관악산과 청계산, 우면산에 둘러싼 수도권에선 자연이 풍부한 편에 속하는 지역입니다만... 역시 도시는 좀 시끄럽고 답답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도 이젠 왜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사는 지는 알게 됐습니다. 인간은 몰려 살도록 설계돼 있는 동물이고,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기 위해선 인구 집단이 어느 정도 크기로 형성이 돼야 한다는 점도요. 그럼에도 산골생태유학이 끝나고 다시 과천으로 돌아오면 설피마을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진은 카톡 프로필을 <곧 진동분교를 떠난다... 으앙>이라고 바꿔놨네요.
경진은 요즘들어 부쩍 산골생활을 결산하는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아빠 여기와서 살면서 좋았어?", "아빠는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우리가 돌아가도 둘째기(길냥이)는 104호 할아버지가 잘 돌봐주겠지?" 이런 물음들입니다. 경진은 이곳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 설피마을을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살 거라고 합니다. 부럽습니다. 이런 두메산골을 고향으로 갖게 됐으니 말입니다. 저에겐 그 옛날 개발 이전 양계장이 있었던 서울특별시 강서구 신월동(현재는 양천구)이라는 고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자연을 벗삼아 놀았던 곳들은 죄다 아스팔트로 시멘트로 덮였죠. 저는 이곳 설피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헤어짐을 슬퍼하기엔 이릅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곰배령 설피마을에는 아직 눈이 오지 않았죠. 딸아이는 눈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고요. 눈 신발인 설피를 신지 않으면 걷기조차 어렵다는 '설피마을'. 예로부터 눈이 많기로 유명한 설피마을에 올해는 얼마나 눈이 쏟아질지 기대가 됩니다. 겨울왕국에서 펼쳐질 산골생태유학의 후반부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웃고 떠들고 놀고 사랑하고 배우고 관찰하고 기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