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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리 Jun 23. 2024

프로 앞의 아마추어

통역 고수들 앞에서 대폭망


캄보디아 전 총리가 국빈방문을 했던 어느 해의 일이다. 훈센 총리와 인연이 오래된 한국의 전 대통령과 오찬 일정이 잡혔는데,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하던 나의 보스도 그 자리에 초대되었다. 장소는 강남의 미슐랭 한식당이었다.


그전에도 캄보디아 훈센 총리를 뵌 적은 더러 있었으나, 한국의 전 대통령을 뵙는 건 처음이었다. 보스는 나도 함께 참석해서 당신의 통역을 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내가 거기에 껴도 될 것 같지 않았다. 당시 입사 3~4년 차 정도였고, 보스와의 합은 잘 맞았으나 그런 중요한 자리는 여전히 긴장하곤 했다.


미팅 당일이 되었다. 오찬 자리에 앉은 두 국가원수 사이에 덕담이 오고 갔다. 두 분 모두 말씀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라, 대화는 끊임없이 연신 화기애애했다.


 훈센총리의 전담 통역사는 캄보디아에서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어서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그분은 마른 체격의 중년 남자분인데, 업무 스트레스 때문인지 살찔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발음은 아니지만 어떤 때에도 총리의 말씀을 막힘없이 전달하는 베테랑이었다.


전 대통령의 전담 통역사도 남자분이었다. 키도 크고 호남형 외모를 가진 분이었는데, 말투가 차분하면서도 다정하고 동시에 프로다웠다. 내가 한국의 동시통역사분을 본 것은 그분이 처음이었는데, 발음, 목소리, 어투, 몸짓 어느 하나 모자라거나 지나친 것이 없었다.


대통령께서는 당신이 할 말을 마친 후에 통역이 전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으셨다. 통역을 하는 도중 대통령께서 갑자기 그분의 말을 가로막았다. “천만 불이 ten million 맞나?” 통역사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또 대통령께서 무안하시지 않도록 차분한 어조로 “백만이 million이고, 천만이 ten million 맞습니다, 대통령님.”이라고 했다. “어 그래? 맞구만.” 그분의 차분함에 나는 속으로 경탄했다. 만일 내가 통역을 하는데 대통령께서 실수도 아닌 일을 그렇게 짚어내신다면,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았다. 아마도 그분은 통번역대학원에서 전문 통역 테크닉을 모두 배우고, 현업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다가 대통령 전담 통역사가 된 것일 거라고 추측이 됐다.


나는 전문 교육 없이 실전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배운 저잣거리 통역사라면, 그는 모든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프로 오브 프로였다. 각 통역사는 모시는 분의 뒤에 의자를 놓고 앉았는데, 갑자기 내가 앉아있는 의자만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잠시 후 발언의 기회가 나의 보스에게 넘어왔고, 보스는 장황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다. 평소에 쓰지 않으시던 새로운 표현을 쓰셔서 나는 순간 당황했다. 통역을 할 때는 문장을 간단하게 끊어서 하곤 했는데, 당황한 나는 보스의 말을 구구절절하게 이어 붙여 말하며, 말을 하면서 길을 잃었다. 보스의 말씀은 훈센총리를 향한 것이었는데, 총리님의 통역사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제스처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순간 나는 더 긴장해서, 말이 한없이 꼬였다. 결국 그 통역사가 이해 못 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날 나의 통역은 폭망 했다.


그날의 오찬에서 기억나는 것이라곤, 두 국가원수의 모습이 아니라, 국가원수의 통역사 두 분뿐이다. 대화의 흐름을 차분하게 이어가던 한국 통역사분과, 나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고개를 내젓던 캄보디아 통역사분. 내가 제대로 말아먹은 첫 통역이었는데, 그 한국인 남자통역사분을 보며 내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어떤 것인지 그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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