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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 Aug 04. 2020

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동생이 결혼을 한단다. 말썽 꽤나 피우던 동네 철부지가 어느덧 서른을 목전에 둔 바이올린 강사가 됐다. 세월이 훌쩍 지나 제 짝을 찾아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한다는 소리에 괜시리 감회가 새롭다.

어린 시절 동생과 나는 참 많이 싸웠다. 연년생 남매가 모두 비슷하겠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사소한 것들이 다툼의 주제였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싸워도 몇 날을 넘기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쑥스러운 마음에 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따듯한 말 한번 제대로 해본적 없지만 마음 속으로는 누구보다 서로를 위한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으리라.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다수 공채 시험에서 떨어지고 심리적 방황을 겪던 시기, 동생이 있던 춘천에 일주일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미래를 보고 공부를 더 이어갈지, 현실이라는 문턱 앞에서 일단 취업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던 시기에 춘천에서의 일주일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무일푼이었던 당시 차비만 달랑 들고 찾아온 나에게 동생은 몇 만원을 쥐어주며 춘천 내 명소란 명소는 모두 구경하고 오라고 말했다. 자신이 강습을 하는 낮 시간동안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머리를 식히라는 것이었다. 매 저녁 근사한 대접도 받았다.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한 강원대 후문, 값싸고 맛있는 학생식당들에서 돈까스와 제육덮밥을 시켜놓고 한껏 먹었다. 한아름 걱정을 털어놓진 않았지만 왜 당시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을까.

남편이 될 동생의 남자친구는 몇 번 본적이 있다. 나도 여러번 여자친구와 함께 동행 했었는데 동생 남자친구는 줄곧 1명이었던 반면 내 여자친구는 매번 바뀌었다. 20대의 사랑이 놀이와 같다면 30대의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제 내 나이도 30대 중반을 향하면서 “결혼은 언제하느냐”는 핀잔을 듣는 나이가 됐다. 사회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내가 결혼적령기에 있음을 실감한다.

나는 언제쯤 결혼을 하게 될까. 그러나 생각이 거듭될수록 현실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혼은 생존과 직결되는 현실의 문제다. 즉, 돈이 있어야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사랑에 대한 책임도, 행복도 영위할 수 있다. 2019년 기준 한국 임금노동자 평균 임금은 3800만원으로 세금을 제하면 월 280만원 수준이다. 연봉 5000만원부터는 상위 20%에 해당하는데 이마저도 세금을 떼면 360만원에 그치고 연봉 1억부터는 상위 2%미만 저 세상 얘기다.

전체 임금노동자 기업 채용비율을 살펴보면 전체 노동자 중 대기업 임금노동자는 12.9%, 중소기업 노동자는 87.1%로 압도적으로 많다. 상위 20%에 해당하는 연봉 5000만원을 벌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기업 기준 6년 6개월, 중소기업 기준으로는 11년 6개월이다. 그러나 요즘 중소기업에서 11년 이상 근속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될까. 힘든 노동환경 속에서 그 전에 퇴사하거나 퇴직을 권고받는 경우가 더 많을 터. 점점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줄어들고 있음을 결혼을 앞두고 다들 체감하고 있을게다.

요즘 200~300만원 정도 벌어서 가정 유지가 가능하기나 한가. 물론 허리끈 졸라매고 아무것도 안 쓰고 숨만 쉬고 살면 살 수야 있겠으나. 물질이 모든 가치를 흡수한 페티시즘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모님의 도움이 없다는 가정하에 집 대출 원금과 이자, 아이들 교육과 양육비, 생활비, 양가 부모님에 들어가는 돈 등을 다 합치면 우리나라 상위 20%가 평균적으로 버는 월 360으로도 노후준비 자체가 불가능하다. 젊은 시절엔 가난을 불편함 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고 쳐도 노년에 경제력은 인권이다. 어디 돈 없는 노인을 거들떠나 보는 세상인가.

결혼을 하기 어려운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무한 경쟁에 휩싸이는 학교 교육시스템은 내가 자식을 낳기 꺼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는 얼마나 유능한 산업화 역군을 만들어내는지에 방점이 있다. 대학은 대기업을 뒤에 두고 직업학교로 전락한 지 오래다. 서열화된 대학이라는 획일화된 목표 아래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고 창의적 상상력을 거세한 입시 주입식 교육을 받고 꿈을 잃고 표류한다. 한 번이라도 학교에서 가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을 한 적이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표현하는 선진 민주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을 했는지 묻고 싶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최대의 전성기인 1970년대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무한경쟁체제에 내몰린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한다. 프롬은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 의문을 가졌다. 이미 세계적 자본주의 시장은 필요 이상의 공급과잉 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필연적으로 5% 이상의 실업이 존재하는 1대99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실패가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산다. 또한 사회는 시장 논리에 맞춰 이미 포화된 공급에 맞춰 소비를 늘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주체성을 잃고 사회가 원하는 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고 소유에 집착한다. 그 가운데 경제적 풍요와 여유는 일부 선진국에 국한되며 국가 안에서도 삶의 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어찌보면 최근 현대인들 느끼는 불안과 우울은 이 사회가 내재한 보편적 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혼적령기 젊은이들의 결혼을 꺼리게 만드는 사회 문제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쯤 해두고 현실을 보자. 우리나라 청소년 사망률 1위는 8년째 자살이고 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최하위다. 우리나라 인구 10만명당 자살률(24.6명) 또한 부동의 OECD 1위로 OECD평균에 2.1배에 달하는 업적(?)을 기록 중이다. 산업재해로 매년 사망하는 노동자 수가 1위인 것에 반해 합계출산율이 0.92명으로 세계 최하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 비혼족이 늘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행복하기 어려운 세상인 것은 틀림없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동물들도 본능적으로 번식을 스스로 조절한다고 하는데 인간이라고 다르지 않을터다.

허나 우리는 본능에만 의존하는 동물과는 다르다. 1차원적으로 ‘탓’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돌파구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여정, 행복은 결국 관계 속에 있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김정기 교수는 인간이 기반과 관계, 그에 대한 일체감을 욕망한다고 봤다.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 가족, 친구가 소중한 이유는 유한한 내 삶의 일부를 기꺼이 공유했기 때문이다. 사랑과 책임은 이 같은 관계 속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보잘 것 없이 가볍고 유한했던 나를,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킨다.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황‘만’을 탓하며 그 환경 속에 갇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힘 마저 스스로 상실해버린다는 점이 최근 비혼족과 딩크족의 증가가 염려스러운 이유다.

살기 힘들다고 모든 관계를 끊고 고립을 선택한다면 반대로 그 삶은 정말 행복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현 상황에서 분명 결혼은 용기 있는 판단이다. 타인과 새로운 가족으로서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만큼 가치있고 아름다운 일인 것은 분명하다. 사랑과 결혼은 지극히 주관적인 선택이고 그 책임의 주관은 나라는 주체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사랑과 사랑의 결실로서의 결혼은 나로부터 시작해 나에게서 끝나며 인간을 가장 실존적 존재로서 재탄생시키는 이상향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인간성의 회복, 즉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으로써 사랑은 인간을 오롯이 완성시킨다.

끝으로 한 사람의 아내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동생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네가 스스로 투쟁하며 하루하루 버텨왔던 시간들, 고독과 싸우며 현실의 문제에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어쩌면 지금까지 너를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 혹은 트라우마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삶의 과정이 지금의 너를 만든 자양분이 됐음을 의심치 않는다. 이제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또 다른 삶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이 네 안의 탄탄한 밑거름으로 너의 행복한 삶의로써 증명되리라 믿는다.

2020년 6월 25일, 비내리는 날 어느 거리 으슥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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