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그림자
"6시"
재차 물었고 대답은 역시 똑같이 6시였다. 우리가 원한 4시 50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안내데스크와는 다른 시간대를 당당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 사람들 사실 잘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적인(? )의심이 들었고 택시를 어디서 타야 할지에 대한 고민대신 공항전철역 입구로 향했다.
빛
공항 전철역으로 내려가자 처음 보인건 토큰을 구매할 매표소가 비어있는 광경이었다. 대신 무인발권기 앞에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무인발권기라는 기계의 이름이 무색하게 기계 옆에서 대신 표를 뽑아주는 사람 한 명이 줄 선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받고 대신 토큰을 뽑아주고 있었다.
그 앞을 어슬렁 거리며 어리바리함을 만천하에 떨치고 있을 때 회색 운동복에 엄청나게 큰 슈트케이스를 두 개나 끌고 있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해요?"
"혹시 오늘 첫차가 몇 시에 있죠?"
"4시 49분이요. 어디까지 가요?"
"뉴델리역이요"
"저기서 토큰을 뽑으면 돼요. 날 따라와요."
사실 이미 공항직원들에게 인도인에 대한 의심과 실망만 쌓여있을 때였고 갑자기 불쑥 다가온 그가 못 미덥기도 했지만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경계심 반 의지하는 마음 반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 회색 운동복의 남자는 본인의 커다란 캐리어도 내팽개친 채 우리를 無人발권기를 有人발권기로 사용하고 있는 남자에게 찾아가 우리가 가야 하는 역과 두 명분의 토큰이 필요하다는 사실들을 대신 전하며 우리의 곁을 지켜주었다. 한 사람 당 60루피씩 총 120루피를 내야 했기에 500루피를 내밀어 보았지만 잔돈이 필요하다며 "체인지 체인지"를 외쳐댔다.
5시도 안된 새벽에 도대체 어디서 체인지를 해오라는 말인지 첫차 시간이 10분도 안 남은 상황에서 다시 한번 머리가 하얘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우리 옆을 지키던 회색 운동복의 그 남자가 갑자기 본인의 터질 듯이 두둑한 지갑을 꺼내 열어 100루피 다섯 장을 건네주었다. 우리에겐 빛보다 더 빛과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100루피 한 장을 계속해서 뱉어내는 기계 탓에 우리의 티켓팅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분 1초가 아쉬워 마음이 초조한 그 때 그가 다시 건낸 20루피 덕에 우리는 무사히 두개의 토큰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거기서 그의 호의가 끝난 건 아니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의 플랫폼 위치 앞까지 정확히 에스코트 해준 뒤에야 그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이끌고 유유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구권 20루피를 조심스레 내밀어 보았을 때(구권은 가게에서도 잘 안 받아주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길 보고 갔던 터라 구권을 내밀 때 꽤 조심스러웠다.) 흔쾌히 받아주던 그의 모습과 우리가 잘 내려가는지를 지켜보고 떠나가던 그의 뒷모습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짐가방을 쇠사슬로 묶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인도에서 짐을 20m이상 내팽개쳐 놓으면서까지 어리버리 외국인들을 도와준 그 성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첫 번째 고비를 넘기고 공항전철을 타고 뉴델리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진짜 인도 풍경을 처음 마주한 소감은 <혼돈의 카오스> 그 말 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생긴지 몇년 안된 깔끔한 공항과 공항 전철로 포장된 인도가 아닌 또 다른 인도를 마주하게 된 순간이었다.
미세먼지로 뿌연 대기 공기와 새벽의 어둠 속에서도 귀를 찌르는 경적소리의 릭샤와 차들, 길 중간중간 늘어질 대로 늘어져 퍼진 개떼들 그리고 코를 찌르는 냄새, 우리에게 달라붙는 사기꾼까지 정말 눈뜨고 코베이기 딱 좋은 곳이란건 이곳을 두고 말한게 아닐까 싶었다.
뉴델리역에 들어서기 전 우리가 뽑아온 e티켓을 역 앞에 서 있던 여자아이들 무리에게 보여주며 어느 게이트에서 타야 할지 물어보기로 했다. 그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불안한 아이들의 눈동자 사이로 허름한 행색의 한 아저씨가 끼어들어 꽤 자신 있는 말투로 3번 게이트라고 말하자 불안한 눈동자만 굴리던 여자아이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있게 맞장구를 쳐댔고 또 철썩같이 믿어버렸다.
이미 공항에서 한번 당해놓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걸까? 회색 운동복 남자 때문에 다시 한번 신뢰의 마음이 솟구치기라도 한 걸까? 그냥 우리가 바보였던 걸까? 그렇게 우린 또 당하고 말았다. 3번 게이트까지 어렵사리 찾아갔지만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 번호는 보이지 않았고 도대체 해도 뜨기 전에 몇 번이나 머릿속이 하얘져야 기차를 제대로 탈 수 있는 건지 시간은 흐르는데 또 한 번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이젠 누군가에게 뭘 묻는다는 게 무서울 지경이었으나 또 그렇다고 이보다 더 나은 방법 또한 없었기에 우리 앞을 지나던 행인에게 또 한번의 모험을 감행했고 정말 하늘이 우릴 버린건 아니신지 마지막까지 인도인들의 뻥 위에 놀아나다 기차를 놓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 공항을 나서고 한 시간 반 정도에 일어난 이 상황은 인도 여행 내내 꽤 중요한 핵심 예습 경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인도 여행 중 가장 곤란하고 힘들었던 점은 인도인들의 당당한 뻥이었다. 좋게 말해 뻥이지 알지 못하는 내용을 너무 당당하게 자신 있게 말해주는 그들 덕에 나는 사실 몇 번이나 곤란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그때마다 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지 왜 뻥을 치는 건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지만 후에 알게 된 인도인들의 나름의 이유에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헛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도인들은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귀를 어디선가 읽게 되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인도인들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못했을 때 상대방이 실망시키는 것보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게 낫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인식과 머리론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대목이었지만 그들의 문화와 인식이 그렇다고 하니 그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하지만 저런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나름의 배려와 상냥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상대방을 실망시킬 바에야 뻥이라도 쳐서 상대방을 기쁘게 하자는 의도이니 도를 넘긴 했지만 그들 나름의 배려 이리라. 그리고 실제로 내 인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에는 회색 운동복 남자를 비릇한 따뜻한 배려와 때로 과도한 오지랖으로 챙겨주는 인도인들의 정 때문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기억 또한 그들의 과도한 배려 덕에 만들어질 수 있던 것이기도 하니 너무 뚜렷한 양면을 가진 빛과 그림자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