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회사 내 시간을 샀고, 나는 골칫덩어리를 샀구나
옷장 정리
직장인은 회사에 자신의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버는 거라고 했다.
백수는 사주는 회사가 없으니 시간이 많다.
시간이 많으니 평소 외면하기 바쁘던 것들에도 시선이 머물고 시간을 쏟게 된다.
이번엔 꽉 들어찬 옷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빨래를 개켜 넣다가 터질 듯 가득한 옷장 선반이 거슬려 옷장의 옷을 모두 꺼내 방 한가운데 봉긋한 산을 만들어 버렸다.
몇 년 전에 해봤더라? 기억도 나지 않을 과감한 행동이었다.
회사 다닐 때 아침마다 반복되던 고민이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가였고 "입을 옷이 없어"는 매일 반복되는 푸념이었다.
그때도 눈엔 보였다. 티셔츠 한 장 더 들어갈 공간 없이 빡빡한 옷장 선반이
하지만 외면했었다. "시간이 없어"
회사가 사가 버리고 친구와 나눠야 하고 피곤한 몸을 요양할 시간은 있어도
무슨 옷이 들었는지 이젠 파악조차 안 되는 그 옷장을 들여다볼 시간은 없었다.
드디어 내 시간을 사갈 회사도 없고
평일 낮 회사에 묶인 직장인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고
회사를 안 다니니 요양시간도 필요 없는 백수는
과감하게 옷장을 뒤집었다.
별별 옷이 다 나온다.
잊고 있던 옷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이며
아 이 옷 그때 세일해서 싸게 샀다고 엄청 뿌듯해했던 건데 여기 처박혀 있었구나
얼마 전 입을 만한 기본 흰 티가 없다고 알아보고 있었는데 무려 12장의 반팔이 나왔다.
아무도 내 시간을 사주지 않고 있지만
덕분에 티셔츠 값은 굳었네.
이게 요즘 유행이라는 원영적 사고란 건가?
모조리 꺼낸 옷을 다시 예쁘게 접고
입지 못할 버릴 만한 옷도 추려내고
입을 만한 옷은 기부를 위해 또 추려냈다.
그래도 여전히 옷장은 숨 쉴 틈이 없어 보였다.
그 많은 옷이 어떻게 저 안에 들어가 있던 건지 놀라울 따름이다. 저 옷들의 대부분은 내 시간을 팔고 나눈 돈으로 산 스트레스의 찌꺼기들이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몰을 뒤적이곤 했다.
택배를 뜯는 그 순간이 일상의 유일한 행복이던 순간들이 있었다.
이렇게 산처럼 쌓인 옷더미와 맞바꾼 내 스트레스의 산은 어느만 했던 걸까
스트레스와 맞바꾼 옷인 줄 알았는데 그 옷이 또 다른 골칫덩어리로 남게 될 줄이야
새삼 참 부질없는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하지만 난 또
시간을 팔고 나누고 나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도망치려 하겠지.
이 골칫덩어리들을 모으기 위해
내 시간을 팔게 되겠지.
꼭 허망한 돌림노래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