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여름엔 퇴사하는 거 아니야
여름 백수의 조언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xx과장 때문에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역시 관둘래"
"여름엔 퇴사하는 거 아니야. 봄, 가을, 겨울 특히 겨울은 괜찮지만 여름엔 퇴사하는 거 아니야"
"왜? 신년엔 사람을 더 뽑나?"
"그런 건 모르겠고, 더워."
"뭐??"
"더울 땐 회사에 콕 붙어서 회사 돈으로 틀어주는 에어컨 바람 춥다고 카디건 껴입으며 일하는 게 최고야.
너 집에서 에어컨 트는 게 얼마나 손 떨리는 일인 줄 아니?
백수인데 다음 달 전기세를 생각해도 손 떨리고
집구석에서 놀고 있는 딸내미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이 느껴져도 손 떨려.
심지어 우리 에어컨은 구형이라 계속 틀어놓을 수 조차 없어.
잠깐만 틀어놔도 슬그머니 꺼져있는 에어컨을 너는 본 적이 있니?
그리고 이런 날 자기소개서 쓰는 게 얼마나 고통인지 아니?
사람이 너무 더우면 머리가 가동이 안돼.
퇴사 전 내 계획은 기똥찬 자기소개서로 날 화려하게 포장할 계획이었다고
그런데 자기소개서는커녕 카톡 답하기도 힘들어 핸드폰 열 더워서
결국 저 먼지 쌓인 옛날 자기소개서 끄집어내서 글자 몇 개 바꿔서 이력서 내고 있다니까
그리고 겨울백수는 새벽 6시가 되도록 캄캄한데
억지로 꾸역꾸역 일하러 나가는 직장인에서 해가 다 뜨다 못해
중천에 눈을 뜨고도 포근한 이불속에서 꼼짝 안 해도 된다는 그 달콤함에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지만 8월은 해가 새벽에 떠요.
출근시간에 일어나기 싫어도 눈이 부셔서 일어나
더 자려고 해도 더워서 밤새 끈끈해진 내 팔에 내가 놀라서 일어난다.
그리고 백수의 특권이 뭐니?
직장인들은 잘 못하는 평일 여행, 평일 문화생활이잖아.
주말에 줄만 200m 서지 않아도 된다는 거잖아.
전시장 가서 대기번호 400번대 아니어도 된다는 거잖아.
그런데 여름은 그 이동이 고역이야.
전시장에 도착한 내 몸에서 땀냄새가 풀풀
여행 떠나기 위해 찾아간 터미널에서 이미 이마에선 폭포수 땀이 흐르고 있어.
취업이 언제 될지 모르니 무턱대도 해외 지르기도 애매하고
아주 먼 나라 아니고선 한국 근처 나라들을 비슷하게 덥거나 더 덥거나 야
이러니 특권을 누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여름휴가철 회사에서 사람이 안 나가거나 안 뽑거나 심지어 이번엔 추석도 가까워요.
신년에 사람을 더 뽑는진 몰라도 여름에 사람을 안 뽑는 건 확실해
특히 이번 여름은 더더욱
그러니까 8월엔 그냥 회사 에어컨 아래에서 버텨
여름은 회사 에어컨이 최고야"
"근데, 그건 네가 더위 타서 그런 거잖아. 난 더위 안타, 땀도 안 흘려"
"아... 그랬나??"
"응"
"아... 그럼 이건 내 한풀이인 걸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친구의 퇴사계획은 가을로 미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