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시작은 아랫집 할머니의 다급한 소리에 잠 깨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얼른 내려와 봐"
새벽 6시에 어떻게 들어오신 건지 물을 틈도 없이
헐레벌떡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버지가 쓰러져 계셨다.
"아빠, 왜 이래. 아빠 일어나 봐"
아무리 불러도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셨다.
팔과 다리를 자꾸 꼬아대며 어쩔 줄 몰라하셨다.
아직 눈에 눈곱도 그대로인데 내가 꿈을 꾸나. 싶은 마음으로 119에 신고를 하고 아빠와 함께 난생처음 구급차를 타고 두 번의 거절 끝에 한 대학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ct검사 결과 아버지는 뇌출혈
출혈이 심한 상태라 더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며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며 오전 8시부터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이런 장면은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건데 내가 그 한가운데 들어와 앉아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꿈같았다. 뇌출혈? 말로만 듣던 뇌출혈.
몇 년 전 아버지께 종합검진을 권유했다가 싸움만 나고 흐지부지가 된 적이 있는데 더 싸워서라도 그때 검사했다면 나았을까. 며칠 전 두통과 열이 있단 소리에 코로나가 아니겠냐며 타이레놀이나 건네어드린 것이 생각났다. 고혈압 지병 때문에 몇십 년이나 진행되어 온 뇌혈관축소는 그 흔한 뇌 ct만 찍어봤어도 나왔을 병이었는데 그걸 놓치고 이 사태를 마주하고 있었다.
수술 시간은 꽤 짧게 끝났다.
그 사이 구급차에서 연락드린 가까이 사는 친척 내외분이 찾아와 제한 인원 2명에 맞춰 나와 함께 중환자실로 들어가 주셨다.
머리가 모두 깎여있고 온갖 호스가 아빠 몸을 감아싼 상태였다. 조심스레 아빠를 불러 보았지만 아빠는 대답이 없다.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든 아빠의 눈 주변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울컥하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친척분들 손에 이끌려 밥집에서 밥을 먹는데 쌀알이 모래알 같고 좀처럼 넘어가질 않았다.
"먹어야 해. 잘 먹어야 해. 아빠의 가족은 너뿐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잘 버티려면 너라도 잘 먹고 잘 자야 해"
반찬을 건네며 하신 마음 단단히 먹고 잘 버티란 그 말의 무게가 짓눌러댄다
아빠와 나
우리 가족은 둘 뿐이다.
아주 어릴 때 이혼 후 몇 년 뒤부턴 계속 이상태이다. 아빠는 살가운 사람도 딸바보도 아니었다. 형제들마저 고개를 돌릴 만큼 화가 많고 짜증이 많은 힘든 사람이었다.
한 발 떨어져 보면 안쓰럽고 고된 인생을 산 아빠의 삶이 안쓰러웠지만 매일 마주해야 하는 가족은 지옥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작은 일이라도 본인 성미를 건드리는 일이라면 고래고래 고함부터 지르는 성미는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으로 하루하루 더욱 진하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아버렸다.
아버지와 나는 그다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대는 그가 부끄러웠고 버거웠고 힘들었다. 한 편으론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아빠를 좀 떠나 살면 좋을 거라고 했지만 돈 문제도 있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사실 내가 없을 때 혹여나 아파서 도움도 청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큰 일 나는 건 아닐까. 혹시나 하루하루 외롭게 나이 들어가는 아빠의 마지막 마저 외로울까 봐 무서웠다.
아빠에게 그렇게 정도 사랑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피붙이이자 나를 양육하기 위해 애쓴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 괴팍한 성격의 아저씨가 사실은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란 것도 알았다. 나와는 부딪치기 일쑤라지만 집에 수리를 위해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에게 별별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기 좋아하던 그는 분명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 아빠가 저렇게 힘 없이 소리 한마디 못 내고 병상위에 호스만 잔뜩 꼽은 채 누워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부리던 화와 짜증이 사실 아빠도 모르게 병들어가던 아빠의 뇌속 병 때문이었나?그저 성격 나쁘다고 치부하던 그 모든게 병 때문이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이 상황은 뭐지?
지금 상황도, 앞으로의 감당할 일도 온갖 쓸데없는 잡생각을 즐기는 나조차도 상상 못 해본 일이었고 일들이었다.
엊그제까지도 취업하기가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나 하는 고민 따위로 잠 못 이루고 있던 내 고민과 짐의 사이즈는 너무 거대해져 버렸다. 취업은 더더욱 간절해졌다. 더욱 필요해졌다. 잘못된 결과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 수술비, 중환자실, 재활치료, 요양시설까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생각할수록. 답이 없다. 얼마 전 그래도 세상이 내가 버틸정도의 고난을 주는 건 아닐까라는 오만한 소릴 지껄이며 행복회로를 돌리며 지껄인 적이 있다.
오만 그 자체였다
수술실 앞, 중환자실 앞 가족대기실에 오롯이 혼자 기다리며 이 시련은 오로지 혼자 감내해야 할 고통임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옆 자리 가족처럼 토닥일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없다. 아빠의 보호자는 오로지 나뿐. 아무도 날 도울 수 없구나.
몇 번의 백수시절을 겪어봤지만
이번만큼 쓰고 매운 시절은 처음이다.
그저 어느 날 회사에서 쫓겨난 백수의 살아남기 고군분투기 정도로 기억될 줄 알고 남겨보던 기록장에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