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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가출이야!

토끼와 거북

by 이디뜨

'에잇! 집 나갈 거야.'

결심을 하고 3분 만에 집을 나왔다.

저녁에 들어갈 거니까 충전기, 지갑, 차키, 책, 우산까지 챙겼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차! 틴트!'

하루 종일 혈색 없는 얼굴로 있고 싶지 않은데, 다시 들어가기엔 모양이 빠진다.

시동을 켰다.

출발하기 전에 에코백을 뒤적거렸더니 틴트가 손에 잡혔다. 다행이다.

신기하게도 차가 움직이자 기분이 좀 나아진다.



도착지는 도서관이다.

뛰어봐야 벼룩이지.

갑자기 궁금해서 검색해 봤다.

'You can run, but you can't hide.'

영어 해석이 내 상황과 똑같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족 단톡에 남겼다.

"엄마 도서관 왔음. 6시에 들어갈 거야."

"엄마 혼자? 아빠는? 같이 아울렛 간다며."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가 흘러나왔다.

빗방울은 차를 때리고, 나는 못생긴 얼굴로 울고 있고, 뛰쳐나온 이유도 흐릿했다.

남의 편 때문인 것만 확실하다.

그냥 이 한곡이 딱 끝날 때 뚝! 해야지.




마음으로는 여러 번,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집을 나섰다.

공통점은 남의 편과의 신경전.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유가 수십 가지였다.

이제는 엄마가 며칠 집을 비워도 큰 지장은 없을 만큼 컸다.

오늘은 아이들이 모두 외출하고 없었다.

냉랭하게 둘만 있느니 가게 된 도서관.

몇 시간 가출이 그냥 외출이 되겠다.




'사각. 사라락'

도서관에 들어오니 책장 넘기는 소리가 힐링이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우리, 편하게 말해요'라는 책에서 얘기한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가는 방법은?

거북이는 빨리 가지 못하니, 토끼가 속도를 맞춰야 한다.

토끼는 생각한다.

'아니 거북이는 천년만년 거북이로만 살건가?'

미안하지만 그게 정답이다.

'그럼 나는 토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거북이에게 맞춰줘야 한다는 건가?'

들판에서는 토끼가 유리하지만, 바닷속에서라면 거북이가 토끼를 등에 업고 천천히, 하지만 안정적으로 헤엄치며 갈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모두가 노인이 된다.

그땐 토끼고 거북이고, 젊은 세대가 그들을 이끌 것이다.


토끼 당신, 거북이를 데리고 경주 같은 거 하지 말고 함께 가면 어떨까요.
불평불만 접어두고 걸어가 봅시다.
쉬엄쉬엄 그렇지만 꾸준히.
그러니 이 들판에서는 당신이 좀 힘들어도 기다리기 지루해도 참아줘요.
기다렸다가 같이 가고 속도 맞춰 함께 움직여 줘요.
언젠가 바다에 가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가족 간에는 서로가 토끼이기도 거북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을 '경주'라고 생각하면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가 안 되는 경주는 하지 말고, 쉬엄쉬엄 꾸준히 가라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콕 박힌다.


아이를 스카에 데려다주러 나가니, 가을 온도가 딱 좋았다.

딸아이가 아빠도 운동삼아 엄마랑 걸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의 건강을 늘 염려하는 딸이다.

나는 남편에게 밖이 너무 좋다며 외출을 제안했다.

남편도 내 제안에 동의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좀처럼 준비를 하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다가 어서 준비하라고 얘기했다.

"왜 난리야?"

외출준비를 닦달해서 짜증이 난단다.

사람이란 자기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 있다.

외출이 내키지 않으니 닦달로 느껴졌나 보다.

남편은 편안하고 재밌게 집에서 영상이 보고 싶은 거였다.

우리 나이엔 많이 걸어야 하는데, 매번 이런 식이다.

항상 도돌이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 가."




토끼는 거북이와의 외출 대신 가출을 택했다.

집에 돌아가면, 토끼가 씩씩거리며 나갔다 왔다는 사실 말고는 달라지는 게 없다.

거북이는 원하는 대로 쉬어서 평안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인 정비의 시간일까?

예쁜 말을 기대하는 인내심 약한 토끼와 토끼의 속도를 이해할 수 없는 거북이.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경주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의 차이에서 온 문제이다.

토끼와 거북이는 영원히 나란히 갈 수 없다.

자기만의 속도로 달리는 거다.

이번 주는 아들의 수료식이 있다.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길게 냉전을 할 수가 없다.


토끼는 도서관 책냄새 맡으며

거북이는 아내가 외출한 집에서 조용히

각자 떨어져서 충전할 뿐이다.

가출 완료 기한까지 두 시간 반 남았다.

이제 진짜 책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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