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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토리 Aug 02. 2021

암울했던 유년기와 학창 시절

세 번째

 중학교로 배정하려면 주소지와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고 부모님께 알아오라더군요. 그래서 물어보고 알아왔어요. 문제는 학구열 높은 중학교에 배정받기 위해서 엄마 친구분께 부탁드려 학교와 가까운 주소를 알려주신 거죠. 우리 집이 아니지 않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그냥 그거 알려주면 된다며 짜증 내셨습니다.


 반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앞으로 가서 주소를 알려드렸는데, 앞자리 아이들이 듣더니 '선생님! 쟤 거기 안 살아요! 저번에 우리 동네에서 봤어요!'라며 수군댔습니다. 솔직히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저 말을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고, 선생님은 그걸 묵인하시며 아이들에게 그저 조용히 하라고 호통치실 뿐이었죠.


 제 평판이 더 안 좋아졌습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볼까 봐,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슈퍼에도 잘 안 가고 밖에 나가 놀지도 않고 학교를 더 일찍 나왔어요. 그래도 눈이 많으니 걸리긴 했지만 제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리고 영문 이름을 말하러 나가니 아이들이 또 귀 쫑긋 거리더라고요. 작게 얘기했더니 선생님이 안 들린다며 짜증 내셔서 어쩔 수 없이 조금 크게 얘기했는데, 그걸 듣고 또 놀렸어요.


 성씨 발음이 약간 달라서 그런 건데 무슨 북한 이름 같다며 빨갱이라 놀리더라고요. 안 그래도 이름이 개그우먼 닮아서 놀림 많이 받고 있었는데 오히려 더 늘려줬죠. 뚱뚱한 빨갱이 뭐시기가 되었습니다. 이젠 지칠 대로 지쳐서 저항할 기운도 없었어요. 격한 저항은 없었고 그냥 작은 목소리로 하지 말라고 외쳤으니 들릴 리가 없죠.


 졸업앨범을 위해 사진을 찍어도 저는 혼자 서 있거나 그룹별 사진을 찍어도 저는 받침대였고 매일 놀림받거나 지우개나 종이를 맞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래도 나름 저와 놀아줬던 남자애들도 이미 곁을 다 떠나고 없었어요.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생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묵묵히 다니고 있었는데, 저한테 준비물 부탁을 하러 제 반에 놀러 온 동생이 알고 말았어요. 제가 왕따인걸.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얘기했지만, 친구 많은 제 동생은 이해를 못했어요. 얘기해야지 안 하면 어쩌냐며 집에 가자마자 어머니한테 얘기하더라고요. 학기가 거의 끝나서 조금만 참으면 중학교 가는데.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그날 어머니는 충격을 드시기도 했지만 저를 문책하시더군요. 왜 여태 말을 안 했냐고. 왜 날 나쁜 사람 만드냐고. 물론 우시기도 우셨어요. 속상했겠죠, 많이 혼내긴 해도 당신 나름 사랑하는 큰딸이 얼마나 그렇게 살았는지 몰랐으니까요. 이미 그건 소용이 없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담임을 찾으셨습니다.


 담임과 상담을 하고 종례시간에 눈 감고 들으라면서 우리 반에 누군가를 따돌리고 있고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며 가르쳤죠. 다음날 아이들은 두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예 무시하거나 비꼬면서 친근한 척하거나. 이미 말을 잘 안 했지만 더욱 입을 다물고 다녔고, 졸업식을 맞았습니다.


 졸업식에는 저와 사진 찍은 사람이 없었어요. 어머니께서 전에 몇 번 봤던 어떤 아이를 억지로 붙잡아 찍었지만 그 아이 표정은 굳은 채였어요. 속으로 차라리 찍지 말고 집에 빨리 갔으면 싶었지만, 그저 어머니 명령이니까 들을 수밖에요. 그리고 그날 받은 앨범은 나중에 다 큰 성인이 된 뒤에나 봤습니다. 보면 스스로 얼평이나 하며 자신을 깎아 먹기만 했을 테니.


 새로운 동네의 중학교에 갔습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한다는 설렘에 기대가 가득했어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죠. 그곳 아이들은 성적이 대체로 높다는 것. 저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기에 제 성적이 문제가 됐죠. 시험 이후 뒷자리 아이가 점수 얼마냐기에 말하지 말라며 귓속말로 알려준 게 다 퍼졌어요. 주변에서 저를 모르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요.


 어머니는 시험지를 보며 항상 이걸 왜 이해를 못하냐며 질책했어요. 나름대로 생각해서 푼 문제였지만 항상 틀려서 의지도 약해지고 점점 성적이 안 좋아졌어요. 저는 그곳에서도 서서히 왕따가 되어갔고, 초등학교 때보다 더 교묘하게 몰렸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걱정이 돼서 담임과 면담을 했고 담임은 나름대로 해보려 저와 사이가 가장 안 좋은 무리들의 여자애들과 교무실 청소를 시켰어요.


 나름 잘해보려고 좋아한다던 가수들의 사진이나 책받침 같은 걸 만들어서 가져다줬지만, 선생이 보는 앞에서는 기쁜 척 고맙다며 포옹하더니 선생이 보지 않으니 돌변했고요. 담임이 저에게 누가 기분 나쁜 말을 한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 해서 앉아 있던 제 앞에서 삿대질하며 다른 아이들과 '아, 얘가 걔야?' 하며 갔던 걸 말했어요. 그러나 다른 의미가 없었다던 그 아이 말을 믿고 담임은 제게 짜증을 냈고 더 이상 저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죠.


 힘겨워하던 저에게 어머니는 최후의 카드로 전학을 얘기했습니다. 이사는 힘드니까, 이모집에서 다니게끔요. 아예 다른 지역의 여자 중학교였고, 교복값이 만만찮았습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그곳에서도 문제가 좀 생겼어요. 이 정도 되니 이제 부모님마저 제가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친구들과 엄마가 짜증 난다 아빠가 짜증 난다느니 그런 얘기도 하고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고.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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