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숨어서 홀로 지내다가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와
일에 복귀하고, 교회도 다시 나가고, 정기적으로 가족과 시간을 갖던 그 시절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울었었다.
우는 것도 그냥 운 게 아니었다.
때론 훌쩍이고, 때론 흐느끼고, 때론 엉엉 울고
어쩔 때는 오열하면서 울었다.
복귀한 일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부서지고 으스러져서 망가져 있는데,
내가 마주하기 위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들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도 버티기 어려워서
조던 피터슨 교수의 말처럼
한 시간, 혹은 십분 단위로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지냈던 거 같다.
그게 하루 이틀로 괜찮아진 게 아니고
2021년도 8월부터 2023년도 9월 넘어서까지도 그랬으니까
꽤 오랜 시간을 아침 저녁으로 울면서 살았던 거다.
사람들 앞에 있으면 울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고
집에 가면 기도하면서 엉엉 울었다.
교감신경이 항진된 상태,
불안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그 상태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신경증이 온 것인지, 아니면 교감신경 실조증인지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더 지속될지 알 겨를이 없었다.
수술도 생각했다.
교감신경이 항진된 상태가 지속되는 사람들
그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받는 수술도 있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인 감각을 어떻게든 다뤄보려고 했었다.
편해지고 싶었다.
예전에 알코올에 빠져 살았을 때처럼
술에 취하면 긴장이 이완되는 그 느낌이 지속되길 바랐다.
아니면 예전에 위 내시경 받으면서 수면 마취에 쓰였던 화학 성분 덕분에
마취에서 깨어나며 아주 잠깐 세상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대담함이 들었던 그 느낌을 계속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이 잠잠하고 편안하고 대담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술을 참 많이 고민했다.
‘내 교감신경 사이즈는 일반 전선 굵기가 아니라 3상 이상의 고압전선 같은 게 아닐까?’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게 아니라 항상 100% 출력으로 열려있는 걸까?’ 생각했다.
별일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두려운 건지,
업무 전화 한 통화 거는 것도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동료의 불만 섞인 투덜거림은 왜 그렇게 무서운지 회사가 가기 싫어질 정도로.
그리고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무질서하고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지
내 눈동자는 흔들거리고 입술은 꿈틀거렸다.
목소리는 떨렸다.
누구를 향하는지,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분명치 못한 나의 행동과 언어들,
매일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침대맡에 무릎 꿇고 앉아서 우는 거였다.
울면서 기도했다.
그날 하루의 짐을 내려놓는 일은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하루하루를 감당해낼 힘이 없었다.
내 생각에 귀 기울였으면, 내 감정을 따랐으면
난 또다시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이제는 꽤 제법 알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모르겠던 것은,
도대체 이 고통(두려움, 불안, 때론 공포)이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평생 지속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내 생각이었다
고통이 너무 짙었으니까. 고통 가운데 있었으니까.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고통은 현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겐 원칙이 있었다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무서워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갔다.
상황이나 감정, 그리고 내 생각이
내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 중심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했다. 왜냐면,
내 감정 따르다가, 상황을 바라보는 내 시선대로 살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도 못 만나는, 사람을 이용해 먹기만 하고 빌붙어 살려고만 하는 병신 같은 인간이 되어버렸었기 때문이다. 살아왔던 대부분의 날들을.
그리고 어느 때가 기준선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2021년 7월, 비행기에서 공황발작을 경험했던 날부터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전부터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2021년 10월 가족들 틈으로 왔을 때부터였을 수도 있다.)
2022년도 중반이 지나며 일과를 지내는 순간순간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일곱, 여덟 살 어렸을 적에 동네 무서운 형아들이 골목길을 막고 서 있을 때, 멀리 뒤로 돌아갈지 아니면 형아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지 고민하던 중에
갑자기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엄마가 등장하며 의기양양하게 엄마 손을 잡고 형들 옆을 지나가면서 느꼈던 그 기분
내가 의지하는 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느꼈던 그런 기분
자신감이 샘솟고, 대담함이 나오고, 나 자신이 나 이상이 될 수 있는 그런 기분이
어느 순간 이따금씩 짧은 순간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집을 잃어버린 공허한 내면이 다시 채워지는, 잃어버렸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 나는 이 느낌에 관한 설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집이 만들어지는 기분”으로.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부모가 있는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때문이다.
혹은 새로운 공동체와 함께 새로운 집을 짓기 때문이다.
그 집이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다면
그 사람은 존재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든 물리적, 정서적, 관계적, 사회적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집이 견고한 사람은 물리적, 관계적, 사회적, 정서적, 사회적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존재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확고하다는 것은 그의 삶의 방향에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결혼 이후,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집(존재)이 정해진 이후,
아내와 도대체 몇 번을 싸웠는지 모르겠다
자정이 넘도록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며(이웃들에게 얼마나 민폐였을까) 각자가 어찌나 본인의 주장을 자존심을 내세웠던지
그리고 때로는 언어로 드러나지 않는 이기적인 순간들, 수 싸움들, 내려놓아지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그와 연결된 일상의 패턴들, 아직도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영역들..
위와 같은 순간들을 지나가더라도 이것들은 우리 집의 방향을 정하는 요소가 아님을 안다.
우리 집의 방향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의 언약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웃음과, 다툼과 소리침과 새로운 생명과 고단함과 울부짖음과 기뻐 노래하고 춤추고 감사하는 이 모든 순간들은
우리 집이 완성되어가는 이야기의 배경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