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커서 뭐가 될 거니?” 부모님이 제게 자주 물은 말입니다. 어릴 때 필자의 꿈은 모형 만드는 일을 하며 저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인생 최대 반항 시기, 중학교 2학년 때 필자는 동네 도서관을 밥 먹듯이 다녔습니다. 그 당시 도서관 프린트실에서 종이 모형 도면을 출력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 종이 모형 만들기에 빠져 모형으로 이삿짐 상자 2개를 채우고, 여름방학 내내 방에 틀어박혀 500피스짜리 화이트 퍼즐을 맞추며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형적인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였습니다.
사업을 하는 요즘 누군가 사업에 가장 필요한 자질을 물으면 ‘오타쿠력’이라고 답하곤 합니다. 한 가지에 온 에너지를 쏟아 장기간 몰두할 수 있는 힘. 이런 자질을 필자는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어른이 된 요즘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옛날의 오타쿠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성공한 스타트업의 생애주기를 뜯어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시장 가능성을 보고 아이템을 선정하는 게 일반적일 거 같지만, 사실 대부분 사업은 대표자의 욕구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너무 원하지만 현재 존재하지 않아 불편한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다수가 누릴 수 있도록 사업화합니다. 한 가지 문제에 집착하고 솔루션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대표자의 첫 번째 오타쿠력이 발휘됩니다.
사업이 어느 정도 비즈니스 모델 형태를 갖추고 나면 직접 고객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현재 사업 모델의 한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비즈니스 모델은 사업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피보팅(Pivoting)을 하게 됩니다. 대표자의 오타쿠력은 여기서 다시 빛을 냅니다. 사업으로 풀고자 했던 시장 문제를 집요하게 뜯어보며 사업 모델을 더 효율적이고 현실적이게 다듬어야 합니다. 안 되는 사업을 잘되게 만들기 위한 피보팅은 정말 많은 에너지와 고민이 필요합니다. 많은 기업과 대표자들이 피보팅 시기에 지쳐 포기하게 됩니다. 이때 오타쿠력을 발휘해 몰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피보팅까지 완료한 사업 모델이 안정권에 오르면 스타트업은 규모 확장을 위한 스케일업(Scale up)을 도모합니다. 스케일업을 고민하는 시기에 대표자는 또 한 번 본인이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사업에 녹여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행업으로 시작한 필자의 기업이 점점 공간 개발에 대한 파이를 키워가며 건축업으로 스케일업 하는 경우도 그러합니다. 이 시기에 대표자 본인이 과거에 오타쿠력을 펼쳤던 경험을 상기하면 대표자가 원하는 스케일업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업을 현금화할 수 있는 엑싯(Exit) 시기가 오면 대표자는 그동안 몰두했던 사업에서 한 발짝 벗어나 오랫동안 꿈꾸던 자아실현을 이루곤 합니다. 이때는 사업과 크게 관련 없는 꿈을 이루는 게 가능합니다. 개인의 이름으로 재단을 설립하는 일. 대저택을 짓는 일.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철학자가 되는 일.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일 등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사업이든 가장 마지막까지 사업과 함께하는 사람은 대표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업이 좀 더 롱런(long run) 하려면, 사업은 대표자의 욕구를 반영한 후 대표자의 오타쿠력을 동력 삼아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필자의 경우 어릴 때부터 바라던 터무니없는 꿈들을 사업을 통해 하나씩 실현하고 있습니다. 내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 건축을 하고 싶다는 꿈.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 디지털 노마드가 되겠다는 꿈. 우주에 가겠다는 꿈.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을 하나둘 현실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꽤 낭만적인 삶입니다.
사업은 대표의 꿈의 크기만큼 성장한다고 합니다. 터무니없을 것 같은 꿈을 꾸며, 오늘 퇴근 후엔 오랜만에 다시 종이 모형을 만들어야겠습니다.
_낭만농객 김농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