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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자연인 Mar 31. 2023

글을 쓰는 이유

나는 아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중 가서 자식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글로 남겨두면 더 낫겠다 싶다.


돌이켜보면,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 대신 나를 키워준 건 할머니였다. 그래서 사실 부모님보다 할머니가 더 애틋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취생활을 시작하기 전 중학교 때까지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 집은 왕복 2차로 길만 건너면 있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커서도 나는 할머니와 같이 잠을 잤고, 두 동생은 부모님 집에서 살거나 할머니 집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는 아궁이 가마솥에 밥을 지었고 잔불로 생선도 구웠다. 가끔 한 솥 가득 수정과에 곶감을 푹 삶아 시원하게 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할머니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말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해녀가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굴곡지고 아픈 근현대사를 살았을 것이다. 듣기로 큰 아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유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또 할머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감옥에 있었던 적도 있었고 일본 사람들이 친절하다며 좋은 기억도 가지고 있었다. KBS 뉴스에서 가끔 짤막하게 NHK 방송을 틀어줄 때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어렴풋이 일본어를 알아듣는 것 같기도 했다. 일본어로 저녁 인사는 곰방와라는 것을 할머니가 가르쳐줬다.


할머니는 재혼을 했다고 했고 군대를 막 제대한 아빠의 이복형이 여수로 찾아와 재회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할머니 집 전화기 밑에는 빨간 김치통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전화번호가 적힌 노트와 각종 종이 쪼가리가 있었다. 할머니가 원할 때마다 김치통에 전화번호를 찾아 큰아빠나 할머니가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수화기를 할머니에게 건네줬다. 할머니는 글자와 숫자를 몰랐다.


아직도 할머니가 큰아빠를 보기 위해 제주도로 갔던 기억이 난다. 손수 키운 깨로 짜낸 참기름과 가방이 꽉 차서 잘 들어가지 않던 시금치를 가방 측면으로 꾸역꾸역 집어넣던 장면이 아직도 생각난다.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간 날이었다. 할머니는 제주도를 떠나 수십 년 만에 다시 제주에 갔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제주에 흩어져 사는 친지들도 만나 그간에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제주도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럼에도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남았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그 느낌이 어땠을지 대충 상상이 된다.


할머니는 나를 제일 예뻐했다. 나는 할머니의 다리를 곧잘 주물러줬는데 커갈수록 그게 귀찮아졌는지 할머니도 손자 눈치가 보였는지 가끔씩만 부탁했다. 그래도 내가 가장 잘한 일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할머니 집에 다녀갔고 다리를 주물러 드린 것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까지 들어가는 것만 보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었다. 그러다 대학교까지 들어가는 것만 보고 죽어도 좋겠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고3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돌아가셨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싹싹한 손자 며느라기와 도윤이와 다연이를 보고 증손자, 증손녀를 보았으니 이제 죽어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버스가 끊긴 밤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영화에서처럼 눈물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를 줄 알았는데 나지 않았다. 나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잔상이 오래가는 것 같다.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울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염을 하고 관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할머니 얼굴을 보았다. 피부가 아주 하얗고 고왔다. 상여에 관을 싣고 동네 반 바퀴를 돌아 상여꾼들이 장지인 할머니 밭으로 가는데 마지막 오르막길에서 품삯으로 실랑이를 벌여 어린 마음에 아주 짜증 났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그게 하나의 문화였나 보다.


내가 하는 업무 특성상 제적등본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궁금해서 할머니의 제적등본도 발급받아보았다. 알고 있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제적에 있긴 있었지만 제적등본에서 가리키는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데 아버지 없이 자란 아빠도 잘 모를 듯하다. 부자간에 살가운 대화를 하는 사이도 아니니 인터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머니도 없으니 이제 영영 알 길이 없다. 할머니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 채 나의 훗 세대는 살아갈 것이다.


결국 할머니는 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으니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모진 세상을 살아갔는지 알아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틈틈이 나의 감상을 모아서 먼 훗날 자식들에게 한 권의 책으로 남겨줄 생각이다. 그 위에 아들과 딸도 그들의 삶을 기록하면서 페이지를 늘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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