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을 참 못했다. 재능이 별로 뛰어나지 않으니 기술 습득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고, 그에 따라 재미를 못 느끼면서 노력도 덜 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던 것 같다. 학창 시절 체육 실기평가 성적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아서 내신 성적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 유학 시절 학교 앞 공원에서 테니스 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테니스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던 이유, 이제 골프를 배울 나이가 되지 않았냐는 주변의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그나마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체력만 있으면 되는 달리기, 줄넘기, 등산 등은 남들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는 않고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유학 전에는 등산을 좋아하여 1주일에 서너 번씩은 회사 숙소 근처의 남산을 오르내렸고 제주도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수시로 한라산 백록담과 윗세오름, 각종 오름 등을 드나들었으며 친구와 지리산 종주를 하기도 했다. 한때 달리기도 잠시 했는데 영국에서 집 근처에 있던 알렉산드라 공원(Alexandra Park)을 한 바퀴 돌고 왕복하는 코스를 주로 애용했다.
작년 여름에 「행복한 달리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우연히 접했다.(링크) 시리즈의 첫 번째 글은 마라톤 완주가 목표가 아닌, 순수하게 즐겁고 행복한 달리기를 위해 기억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동안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내용과는 많이 달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칼럼의 저자인 작가 이범준이 쓴 책(『일본제국 vs. 자이니치』)을 예전에 읽었는데 그 방대함과 성실함에 놀랐던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칼럼 내용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연재되는 칼럼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마음이 움직였고, 여름이 끝나가는 9월 정도부터 가볍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겨울이었던 12월에서 2월까지를 제외하고 평균 1주일에 두 번 정도씩 달렸다. 보통 아침에 집 근처의 홍제천 산책길에서 출발하여 한강과 홍제천이 만나는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4.5km 정도의 거리를 뛰었다. 5월부터는 아침 출근 시간이 빨라지면서 주로 저녁때 달렸다. 이번 여름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다가오는 겨울에도 계속해서 뛰어볼 생각이다. 이 정도면 딱히 취미가 없던 내 인생에도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디어 생긴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정을 붙이다 보니 서서히 장비에도 투자를 하게 되었다. 나는 발 볼이 넓은 편이라 신발이 쉽게 망가지는 바람에 이제까지 신발을 사도 오래 신은 적이 없었다. 약 1년 간은 예전에 신던 낡은 운동화를 신고 뛰었는데 얼마 전에 큰맘 먹고 러닝 용으로 17만 원짜리 러닝화를 구매했다. 그다음부터 달리기를 할 때마다 발이 너무 편해졌는데 오랜만에 나만을 위한 소비를 한 것 같아 정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달리기를 할 때는 위의 칼럼에 나온 조언을 대부분 따라 하고 있는 편이다. 페이스와 기록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휴대폰에 달리기 앱도 설치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집착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는지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통해 코스를 몇 분에 뛰었는지 정도는 확인하고 있다. 대부분 가능한 한 가벼운 옷차림으로 혼자서 달린다. 이어폰도 끼지 않고 달리는데 처음에는 지루하기도 했고 온갖 종류의 잡생각이 떠오르면서 괴롭게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달리면서 튀어나오게 될 잡념이 반가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달릴 때 드는 잡생각은 달리면서 몸이 힘든 걸 잊게 만드는 데 특효약이고, 신기하게도 달리기를 할 때 잡념을 많이 할수록 평상시에는 잡생각이 줄어드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조언들은 마라톤 풀코스를 여러 번 완주하고 거의 매일 달리기를 하다시피 하는 고수들이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나서 결국 '그저 지속적으로 즐겁게 달리는 게 최고더라.'라고 회고하는 느낌이긴 하다. 난 그런 고수가 될 능력도 의지도 없고 횟수도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마냥 힘들지만은 않고 재미를 찾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빠르지 않게 꾸준히 달리는 데 집중하고 싶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겠다는 마음도 전혀 없다. 다만, 굳이 목표를 찾자면 지금은 뛰는 시간이 25분도 안 되는데 30분 이상부터 지방이 연소된다고 하니 체지방을 줄이기 위해 점점 달리는 시간을 늘려서 한 번 달릴 때는 10km 정도까지 뛰는 것이다.
* 제목 사진 출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