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한국으로
「태국 이민국에 입소하다(2) 」
우리는 태국의 이민국 숙소에서 생활했다. 사람 수에 비해 누워 잘 자리가 부족해서 권리금 형식으로 일정금액 돈을 낸 사람만 누워서 잘 수 있는 처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셋째 딸 명희가 한국에서 돈을 넉넉히 보내주어 비교적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이 돈이면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게 그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돈이 있는데도 그냥 지나치자니 마음에 걸렸다. 없이 살았지만 돈이 어떤 것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릇 돈이란 내가 쓰지 않고 쌓아두면 내 기분만 좋을 뿐이지만 필요한 이에게 쓰이면 그제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 그래서 돌고 돌아 돈이라 그랬다. 돈을 쓸모 있게 쓰기 위해 같은 숙소를 쓰는 다른 사람들 몫의 권리금을 모두 내어 잠자리를 마련했다. 다 같이 힘든 처지에 나와 내 가족들만 편히 지낼 수는 없었다.
이민국에서 난 어떻게든 손자손녀와 조카를 편히 보살피려 애썼다. 하지만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이 곳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청결치 못한 환경 속에서 조카와 손자가 차례로 아프기 시작했다. 조카 숙희가 먼저 피부병에 걸렸다. 그 다음은 손자 성운이의 차례였다. 피부병에 걸리자 둘 모두 다른 곳으로 격리되어 생활하였다. 그리고 간병은 내 몫이었다. 정말 어찌나 아이들이 애를 먹이던지. 울기도 많이 울었다. 왜냐하면 나도 지병인 심장병이 있어 그다지 건강치는 못했기 때문이다. 병든 몸으로 타지에서 아이들 둘을 간병하는 심정을 그 누가 알리오. 어떻게든 북으로 송환되지 않고 태국으로 오긴 왔지만 이 곳 태국에서는 관리라는 명목으로 그저 갇혀있을 뿐이었다. 하루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밥을 날라주는 사람 편에 편지를 썼다. 아이들이 병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퇴소하게 해달라 이민국에 간청했다. 이민국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매일매일 맘 졸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말로만 들어온 그리운 조국, 대한민국 땅도 밟고 싶었다.
하루하루 연명하다시피 지내던 어느 날, 아침 8시. 드디어 이름이 불렸다. 안도의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차곡차곡 짐 정리를 했다. 그동안 갇히다 시피 지냈던 이민국 밖으로 나와 비행기 타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우리는 난민촌에 머물렀다. 그런데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나도 병이 났다. 나와 손녀 재희는 심하게 기침을 하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재희는 열이 40도 가까이 열이 올랐다. 하지만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기에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사정을 지켜보던 주변 동무들이 꼬물꼬물 아껴두었던 약을 조금씩 건네주었다. 그들 모두 일전에 잠자리 권리금을 대신 내어줬던 이들이었다. 그 때는 내가 그들을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내가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참 세상은 요상하다. 남은 15일간을 약을 먹으며 버텨내었다. 열이 좀 내릴 즈음 우리는 비행장으로 이동했고 비행기에 무사히 탈 수 있었다.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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