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캔슬!
고객의 집을 팔아주고 30분 거리 아파트 대형 평형 전세로 입주시키는 계약이었다.
공동중개로 집을 보여주고 계약을 하러 갔을 때부터 임대인의 분위기가 묘했다.
계약서를 쓰는 내내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마치 윗사람이 결재를 하듯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60대 후반인 그녀는 갭투자가 성행하던 어느 날, 주변을 돌며 아파트 여러 채를 매입하여 전세를 놓았다고 한다. 나름 고위 공무원 출신 자본가라고 큰소리 떵떵 쳤다고 하는데, 이 전셋집도 그렇게 매입하여 세를 놓았다가 세입자가 교체되는 순간이었다.
전세 잔금 시간은 오후 1시.
임대인이 좀 늦는다 하자, 공동중개한 중개사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본인이 중개업 하면서 만난 사람 중 최악의 진상 임대인이란다. 계약을 진행하다가 중개사가 마음에 안 들면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너는 캔슬!'이라고 말하고 다른 중개사무소로 옮겨간다고 했다.
동네 중개사마다 그렇게 '캔슬' '캔슬' 하다 이 중개사무소까지 옮겨온 것인데, 이 중개사도 며칠 전 '너는 캔슬!!'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살고 있던 임차인이 이틀 전에 미리 짐을 빼자 새 임차인이 잔금 하루 전날 입주청소를 하고 싶어 해서, 기존 임차인에게 동의받고 비밀번호를 가르쳐 줬다는 이유로 말이다. 일부러 찾아와서 주변에 누가 있든 없든 손가락을 눈앞까지 들이대며 '너는 캔슬'이라고 외치는데 모멸감이 온몸을 뒤덮더란다. 두 번 다시 거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을 하다 보면 서로 생각이나 방법이 다를 수 있는데 본인이 '지시'한대로 '의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마치 고용주가 아랫사람을 다루듯이, 너의 목숨이 나에게 달렸다는 듯이, 행동을 하는 것은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러면 오늘 잔금 다 끝난 후에 임대인한테 '너는 캔슬!'이라고 먼저 말하세요."
중개사가 그럴 생각이었다고 말하자 우리는 함께 웃었다. 다만 그 웃음이 잠시 후 일어날 사건의 시그널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1시간 후 임대인이 왔는데 뭐랄까... 비 쏟아지기 직전의 우중충한 진회색 분위기.
잔금은 무난하게 잘 끝나서 임차인에게 이사 잘하라 하고 헤어졌는데, 약 1시간 후 임차인이 전화했다.
"어떡해요. 임대인이 마룻바닥에 스크래치가 많다고 이사 나가는 사람한테 보증금을 안 주고 가버렸대요. 그래서 그 세입자가 집으로 와서 잔금 못 받았으니 저한테 당장 다시 이삿짐 빼라고 난리예요"
뭔가 분위기가 흉흉하더니 그예 사고를 치는군.
우리가 나온 뒤 다시 집을 확인하러 간 임대인은, 거실 바닥에 생긴 스크래치를 문제 삼아 원상복구 하기 전에는 잔금을 못 치른다고 했단다. 그러자 기존 세입자가 '이건 이사 들어올 때부터 있던 스크래치이고 그때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었는데 왜 내 탓을 하냐'고 언성을 높였더니,,,,
"높은 언성에 큰 충격을 먹었으니 병원에 가서 진단서 끊겠다"
고 나갔대나 어쨌대나... 과연 최강이다.
이미 짐을 빼고 새 집으로 이사했던 기존 세입자는 잔금을 안 주고 사라진 임대인이 전화를 안 받으니 속이 타서, 이삿짐을 넣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임대인에게 전세 잔금을 모두 치른 새 임차인은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확인을 해보니, 마룻바닥 스크래치는 20년 차 아파트 일상 기스 정도의 경미한 하자였고, 더구나 기존 세입자가 4년 전 입주할 당시 집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여 임대인한테 사진을 찍어 보내준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다. 바닥 기스 사진을 받은 임대인은 '알고 있다'는 답장도 보낸 상태였다.
나는 물건지 중개사에게,
'이 사안은 임대인이 보증금 반환을 거절할 사유에 해당되지 않으니 빨리 와서 이 사태를 해결하도록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물건지 중개사가 자기는 임대인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니 나더러 직접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어쩔 수 없군.
임대인에게 전화했더니 전화를 안 받고 문자로 보내라는 답이 왔다.
문자를 보냈다. "임차인이 이사할 수 있게 신속히 해결해주시라고..."
그러자 약 두 시간 후 임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왜 자기한테 그런 경망스러운 문자를 보냈느냐고 구청에 고발하겠단다.
고발??
나는 답했다.
"고발은 하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임차인들의 문제는 빨리 해결해 주세요."
그러자 전화를 끊더니 10분 후에 다시 전화하여 구청에 같이 가자고 했다.
고발하러 가는데 왜 같이 가냐고 난 바쁘니까 혼자 가라고 했다. 그래도 계속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친한 사이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닌데 왜 손 잡고 같이 가냐고, 씩씩하게 혼자 가서 고발하라 했다. 그랬더니 임대인이 말했다.
"감히 임대인한테 이렇게 무식한 문자를 보내는 거 보니 법도 모르는 사람 같은데, 그러면 계약도 잘 안 될 텐데 왜 바빠요? 바쁠 리가 없는데 거짓말도 잘 치네"
"내가 바쁘든 말든 신경 끄고 빨리 세입자한테 보증금 반환해 주고, 공무원들 퇴근하기 전에 구청이나 다녀오세요"
그래도 전화를 안 끊고 씩씩대길래 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중개업 20년 만에 민원 넣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세입자 보증금을 빨리 반환해 주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문자도 참 얌전하게 보냈는데 말이다. 그쪽 중개사한테도 전화해서 고발한다고 협박했단다.
그런 일로 민원을 당한다면 내가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반증이니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고,
그래서 행정처분을 받는다면 대법원까지 가서라도 끝까지 싸우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녀는 30분 후에 나타나서 보증금을 반환해 준 뒤에 의자를 발로 뻥 차고 돌아갔단다. 그리고 구청에는 안 갔는지 1년이 넘도록 아무런 통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