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솔 Apr 23. 2021

아가씨도 어머님도 아닌

예전에 TV에서 지역의 야시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리포터가 푸드 트럭을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인터뷰했는데 한 중년의 여성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 여기 언제부터 줄 서 계셨어요?"

몇 마디의 말이 오가는 동안 리포터는 어머님 존칭을 빼놓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나온 음식을 받은 여성이 자리를 뜨며 유쾌하게 쏘아붙였다.

"자꾸 어머님, 어머님 하지 마! 나 어머님 아니야. 누나라고 불러!"

그 리포터도, 시청자인 나도 그녀가 단지 중년의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누군가의 '어머니'일 거라 단정 지은 것이다. 애는 둘째치고 결혼할 생각도 없는 내가 왜 중년의 이들은 결혼을 해서 자식을 가지는 인생을 빠짐없이 살고 있다 생각한 걸까. 내게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텐데 말이다.


30대에 들어선 후부터 내 나이를 데면데면 마주하게 되었다.

누군가 "몇 살이세요?" 하면 마치 "혹시 빚이 얼마나 있으세요?"

묻기라도 한 듯 쭈뼛거리며 대답하곤 한다. 내 나이를 입 밖으로 꺼내며 새삼 세월을 깨닫는 것이다.

아 맞다. 나 벌써 30대 중반이었지. 

잃어버린 30년도 아니고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왔다 느끼는 인생이지만, 이 대책 없이 먹어가는 나이 앞에서는 뭐라도 도둑맞은 것 같은 허망함을 감출 수 없다. 사위어 가는 내 젊음과 반비례해서 내 연륜은, 인생의 지혜는 과연 쌓여가고 있는가. 나는 아직 20살 때처럼 여전히 철이 없고, 감정적이며 때론 무모하다. 그렇기에 여전히 모든 것이 흥미롭고 또 두렵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날 때면 아직도 변함이 없다. 20년 지기의 눈엔 그저 늘 보아 왔던 중학교 친구일 뿐이다. 이젠 진짜 어머님이 된 그녀들이지만 함께 웃고 떠들 때의 우리는 몇 살일까? 10대 때처럼 우리는 서로를 놀리며 깔깔거린다. 60대가 되어도 "너 그때 담임한테 귀싸대기 맞은 거 기억나지?" 하며 깔깔거릴 게 분명하다. 짓궂은 농담을 하는 친구에게 "뭐야 자네. 그런 시시한 농은 넣어둬." 말하는 게 더 농담 같다. 마음만은 소녀라는 진부한 말은 그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나이가 얼마가 됐든 그때의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얼마 전 친구가 이제 조카를 데리고 나가면 다들 애 엄마로 본다며 한탄을 했다. 내심 이모나 고모로 보이길 바라지만 이제 엄마가 자연스러운 나이가 됐다. 누가 아줌마라고 부른다면 대놓고 기분 나빠하기도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에이~ 내가 설마 아줌마로 보이나~' 생각하고 쿨하게 넘길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이다. 상황에 따라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호칭인 아줌마의 존칭 버전이 어머님이다.


더 이상 아가씨로 보이지 않는 때가 꼼짝없이 어머님으로 불린다 생각하니 거부감이 든다. (그러니까 대체 누구의 어머님이냐고..) 당연한 존칭으로 쓰이는 어머님, 아버님이 누군가에겐 불친절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비혼 인구가 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호칭에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번에 친구가 본사로 발령이 났는데, 새로 들어간 팀의 나이대가 젊어서 자기가 과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고 했다. 게다가 대부분 기혼자란다. 그 지역은 다들 결혼을 일찍 하기에 30대 중반 미혼인 친구의 등장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결혼 안 했다고 하니까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더라니까. 참나."

남의 결혼 유무 가지고 그렇게 놀란다는 게 더 놀랍다. 40대에 미혼이라면 아주 턱이 빠질 기세다. 나는 이제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데다 주변에 미혼인 지인들이 꽤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친구는 주변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모름지기 30대엔 결혼과 출산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 덕분에 나이도 먹고, 결혼 못 한 노처녀 타이틀까지 1+1으로 알뜰하게 챙겨가야 한다.


우리는 인생을 십 년 단위로 끊어 다발로 묶는 데 익숙하다. '30대에 해야 할 인생의 목표'까지 친절하게 붙여주며 말이다. 인생이 직선 마라톤도 아닌데, 남들 다하는 베이식 코스를 완주하라며 압박한다. 본인들의 레이스만 잘 달리면 그만이지 굳이 뛰지 않거나 샛길로 빠진 사람들을 낙오자로 취급하기까지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 나이는 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나는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대다수의 2~30대들이 (무려)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았다는 사실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예전에 2005년에 방영된 '내 이름은 김삼순'을 우연히 다시 본 적이 있다.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노골적으로 노처녀 취급을 받는 삼순이가 고작 30살이어서 새삼 놀랬다. 하긴 나도 그때는 29살까지 결혼을 못 하면 인생이 망하는 줄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그다지 망하지 않고 잘살고 있다.   




어릴 땐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모든 일에 초연해질 거라 생각했다. 상사에 미혹되지 않는다 하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니 그 생각이 얼마나 대책 없었는지 깨닫는다. 남의 말에 유난히 얇은 귀가 팔랑거리고, 습관성 충동구매와 배달 어플을 지웠다 깔았다 하는 내가 고작 4살 더 먹었다 해서 소신 있게 무소유를 실천하는 40살이 될 가능성은 없다.

절제력이 뛰어난 사람은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다. 20대 때 발군의 절제력을 발휘한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절제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물론 타고 난 성격을 바꾸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노력과 인내의 영역이지, 그저 늙는다고 해서 절로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만 봐도 어른이라 할 수 없는 그저 나이만 먹은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의 2~30대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나는 귀 얇고, 물욕과 식탐이 많은 할머니가 될 것 같다(어쩐지 최악 같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비록 중후한 어른은 못 되더라도 무기력한 노인만은 되지 않기를. 더는 아가씨로 불리지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어머님이 아닐지라도 망하지 않는 삶을 지금처럼, 그것도 잘 살아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ASMR로 떠나는 방구석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