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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솔 Apr 01. 2021

ASMR로 떠나는 방구석 여행

요즘 내 유튜브 재생 목록에는 다양한 ASMR들이 추가되어 있다. 예전엔 '굳이 저걸 왜 듣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이명이 생긴 후 일종의 정적 기피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주변이 조용하면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이명 소리에 집중된다. 그래서 일할 때나 글을 쓰고 책을 읽을 때, 잠들기 전엔 꼭 ASMR을 틀어 놓는다. 각양각색의 소리를 찾아 듣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다. 이명 덕분에 뒤늦게 신문물을 발견한 느낌이다.


처음엔 자연 소리를 주로 들었다. 시골의 풀벌레 소리라던가 차분히 내리는 빗소리, 일정한 속도로 해변을 쓸어내리는 파도 소리 등등. 자연 특유의 여유로움과 청량감이 귀를 통해 느껴진다. 특히 시골 풀벌레 소리는 없던 시골집도 그리워지게 하는 농촌 감성이 있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주택이라 가을이면 마당 풀밭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 앞에 서서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이럴 땐 주택이 좋다. 벌써부터 모기들이 거실 창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게 문제지만. 


잠깐. 혹시 모기 ASMR도 있을까? 찾아보니 있다. 한 10초 듣다가 진저리 치면서 얼른 껐다. 자고 있는 친구 귀에 들려줬더니 놀래서 본인 뺨을 때리더라는 댓글이 있다. 일단 즐겨찾기에 저장해놔야지.




한동안은 모닥불 소리에 빠졌다. 그야말로 방구석 불멍이다. 뜨끈한 장작불과 멍한 시선, 타닥타닥 불꽃 튀는 소리. 이 3개가 삼위일체를 이뤄야 진정한 불멍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이지만, 노곤한 침대에 누워 듣는 장작 타는 소리가 제법 감성적이다. 영상마다 타는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서 귀에 딱 안정감 있게 들어오는 소리를 찾기 위해 여러 개를 들어보다 한 영상에 정착했다. 


나 같은 ASMR 유목민들이 많은지 '이 집 불이 제일 좋네요.'라는 댓글에 추천수가 많다. 동영상 조회수나 댓글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ASMR을 즐겨 듣는다.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듣기 시작하면 계속 틀어놓게 된다. 


사람들의 니즈에 부합하는 정말 다양하고 기발한 ASMR들이 많다. 호그와트 그레이트홀에서 공부하는 소리라던가 하울의 욕실 소리, 파리의 재즈가 흐르는 카페 같은 개인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콘텐츠들도 인기가 있다. 카페 ASMR은 달그락 거리는 커피잔 소리,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 잔잔하게 흐르는 배경음악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카페에서 마음 놓고 커피 한잔 마시기 어려워진 요즘이라 더 반갑게 느껴지는 소리들이다. 


ASMR은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풀벌레 소리를 들을 때면 어느 여름날 저녁, 산청의 시골 동네를 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모닥불 소리는 몽돌 해변에 캠핑 의자를 놓고, 멍하니 장작불을 바라보던 때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 소리는 과거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출처_asmr soupe 유튜브 채널


때론 ASMR이 특별한 기억을 남기기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가 'asmr soupe' 채널의 '혼자이긴 싫은데 혼자 있고 싶어. 솔로 캠핑' 영상이다. 풀벌레 소리, 모닥불 소리에 서정적인 기타 솔로가 깔린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조금은 쓸쓸한 새벽의 공기가 감돈다. 나는 주로 책을 읽을 때 틀어 놓는다. 그럴 때면 침대에 누워 책장을 넘기고 있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인테리어 센스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내방이 이때만큼은 세상 감성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아무런 방해도 없는 안존한 나만의 시간. 일상의 봄볕 같은 행복은 그리 대단하거나 멀리 있는 게 아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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