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 리뷰
이토록 끝까지 갈지 몰랐다. 생각 이상이다. 상영 중 옆에 앉은 중년 부부의 볼멘 소리가 나올정도록 불편한 이미지와 영상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괴롭힌다. 나이를 불문하고 노출된 주인공(들)의 몸을 보는 건 점점 힘들어져가고,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자리에서 일어날 힘조차 빼앗는다. 마지막까지 이 기조를 유지하는 감독의 뚝심은 핏빛 잔치를 벌이며 끝내 관객을 넉다운 시킨다. 어쩌면 <서브스턴스>는 왜곡된 미(美) 추구와 젊음을 쫓는 데 혈안이 된 사회적 풍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 이 늪에 빠진 이들에게 전하는 공포의 디톡스 시청각자료와 같다.
별도 지기 마련이다. 오스카 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할 정도 큰 인기를 얻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최고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근근히 먹고 산다. 하지만 제작자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의 50세 생일을 축하(?)하듯 보란 듯이 해고를 전한다. 더 젊고 예쁜 진행자로 교체하려는 그의 속셈에 엘리자베스는 희생양이 되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교통사고도 당한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우연히 병원 남성 간호사로부터 의문의 USB를 받는다. 안에 담긴 건 한 번의 주사로 젊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신약 ‘서브스턴스’ 소개 내용. 거울에 비친 생기 없는 얼굴과 중력에 굴복하는 몸뚱이를 본 그녀는 고민 끝에 서브스턴스를 구매한다. 그리고 약물 주입후 자신의 몸에서 매력적인 20대 수(마가렛 퀄리)가 탄생한다. 예상대로 그녀는 하비의 관신을 받고,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TV 쇼를 맡는다. 하지만 문제는 7일을 기준으로 둘 중 한 명은 잠들어야 한다. 이 균형을 잘 지킨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수는 이 규칙을 어기고 만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를 표방한 사회 풍자극이다. 그 중심에는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자리잡는다. 엘리자베스의 직업은 배우다.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들이 있어야 빛나는 이 직업의 운명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를 옥죈다. 자신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써야 하고,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다 보니 결국 남는 건 노화된 몸과 쪼그라든 자신감이다.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는 과거 빛났던 순간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젊음을 그리워하고 되찾고 싶은 그녀를 이해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혐오에 빠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이는 ‘늙음이 곧 사회적 도태’라는 불안에 잠식된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금이라도 더 젊어져 사회의 가장자리에 남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처럼, 그녀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서브스턴스의 유혹에 빠진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를 뒷받침 하듯 극 중 ‘서브스턴스’를 소개하는 영상에도 두 개의 노란자로 구성된 계란이 나온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는 완벽한 균형을 맞췄을 때 공존이 이뤄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 균형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둘은 규칙을 어기고 서로를 증오한다. 주사를 맞은 후 엘리자베스는 수를 탄생시키고, 젊음과 기회의 빛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빛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7일을 보낸다. 이들의 간극은 점차 벌어지고, 서로를 증오하고, 결국 망가뜨린다. 결국 ‘당신은 하나’라는 명제를 잊은 채 자신의 삶을 더 영위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모든 일을 그르친다. 영원한 젊음을 원하며 이를 상징한 와인을 탐닉한 클레오파트라, 젊은 하녀의 피로 젊음을 유지했던 피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를 따라하듯 엘리자베스 또한 욕망이란 늪에서 허우적 된다.
<서브스턴스>는 자신의 욕망에 자신이 결러든 여성의 참혹한 최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이야기의 힘을 가진 영화는 프랑스 여성 감독인 코랄리 파르쟈가 연출과 각본을 담당했다. 감독은 덫에 빠진 건 여성 자신이지만 더 아름답고 완벽한 나를 원한건 대중, 특히 젊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시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도 꼬집는다.
하비를 비롯해 미디어 수뇌부와 자본가들이 모두 남성인 건 우연히 아니다. 이들의 시선에 응당 응해야 자신이 빛난다는 걸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이 미친 선택을 하며 또 한 번 그들이 마련한 무대에 오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껍데기는 바뀌었어도 자신의 몸둥아리에서 나온 분신(들)이기에 그 욕망은 변함없다. 하지만 모습이 바뀐 후, 대중들은 사랑이 아닌 혐오의 시선을 보내고, 이를 확인한 그녀는 별빛처럼 빛나는 순간은 핏빛으로 바꿔버린다. 용솟음치는 핏빛은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데,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이같은 괴물로 만들 게 한 건 그녀의 욕망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너희(대중)들의 시선도 한 몫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핏물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유심히 보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충격적이고 불쾌하다. 바디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상영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계속 자신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다리를 묶고 엉덩이를 들썩이지 못하게 하는 건 데미 무어에 기인한다.
이는 단순히 혼신을 다한 그녀의 광기 연기 때문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곧 데미 무어처럼 보인다. <사랑과 영혼> 등 1990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여배우였지만, 세월을 막을 수 없었던 그녀는 전신 성형을 시도한 바 있다. 거액을 들여 젊음을 유지하려 했던 과거는 물론, 연기와 작품 이야기 보단 온갖 가십 기사로 만났던 그녀의 삶은 엘리자베스와 닮아 있다. <서브스턴스>가 미키 루크의 삶을 투영한 <더 레슬러>의 여성판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데미 무어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듯한 그녀의 연기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던 울분을 마구 마구 토해내듯 분기점이 될만한 연기력을 뿜어낸다. 골근글로브에 이어 이번 오스카의 유력 여우주연상 후보로 점쳐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개미친 영화’. <서브스턴스> 런칭 포스터에 담긴 이 강렬한 문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학적이고, 파괴적이며, 과감한 노출 등 수위가 높은 충격적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사회상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 우리의 마음 속 갖가지 욕망 덩어리를 터뜨리고, 잘못된 시선을 마취 없이 교정하는 그 고통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이 통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카메라가 아닌 자신에게 키스 퍼포먼스를 날리면 된다. 애써 완성한 화장을 마구 마구 지우지 말고.
평점: 4.0 / 5.0
한줄평: 데미 무어의 개미친 연기에 설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