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글

by 바담풍


깍두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한국의 골목은 언제나 울퉁불퉁했다. 나무뿌리가 솟은 길 위에서, 자갈이 박힌 시멘트 바닥에서 아이들은 하루 종일 뛰어놀았다. 다방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고무줄놀이, 오징어 게임, 딱지치기… 그리고 그 속엔 언제나 ‘깍두기’가 있었다.


깍두기란 놀이에 끼기는 끼지만 제 몫을 못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이었다. 너무 어린아이, 동작이 느린 아이, 방금 놀이터에 들어온 새 아이가 깍두기가 되었다. 규칙을 다 알지 못해도, 실수가 많아도,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해도 함께 있어주는 자리, 그것이 깍두기였다.


이처럼 우리는 경쟁보다 먼저 함께하는 법을 배웠고 지지 않는 것보다 소외시키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 시절의 우리는 그렇게 약한 친구에게도 “너는 깍두기 해”라고 말하며 다정하게 무리에 끼워주었다. 그 말엔 배려가 있었고, 유대가 있었고, 놀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민주적이었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배제하지 않고, 실력이 모자라다고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함께 놀이를 이어가는 지혜. 깍두기 문화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적극적 포용이었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경쟁에서 출발했다면 한국의 깍두기 문화는 관계와 포용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보다 ‘누구도 혼자 남겨두지 않는다.’는 원칙에 더 가깝다. 깍두기가 있는 놀이터에서는 누구나 발언권이 있었고, 서툰 의견도 들어주었으며, 틀려도 함께 웃으며 넘어갔다. 이는 토론 민주주의의 이상적 모델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참여다. 모든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목소리가 들려지는 것. 비록 서툴고, 느리고, 논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공론장에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사회는 이 ‘깍두기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말을 잘 못해도, 논리를 빠르게 펼치지 못해도 괜찮다고, 당신의 말은 여전히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토론교육은 이 ‘깍두기의 자리’를 오늘의 광장 안에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다. 시민 한 명 한 명이 완벽한 논객일 필요는 없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함께 만드는 화합의 사회


한국 사회는 지금 조용하다. 아니, 시끄럽지만 조용하다. 말은 넘치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말은 없고 대화는 많지만 귀 기울이는 이는 드물다. 용기 있게 말하면 나댄다 하고, 무언가 설명하려 하면 설명충이라 조롱당한다. 오글거린다는 말에 감성이 사라졌고, 선비라는 말에 지성은 침묵했다.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이라는 말에 책임지려는 이들마저 입을 닫았다.


누군가의 말은 비웃음이 되고, 다름은 곧 적이 되며, 결국 사람들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말하지 않으니 듣지 않고, 듣지 않으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단절이 되고 단절은 곧 민주주의의 후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말’을 되찾아야 한다. 비난이 아닌 설명을, 우기기가 아닌 설득을, 이기려는 언어가 아닌 이해하려는 태도를. 그리고 말하는 이에게 실제로 보상이 주어지는 구조. ‘참여소득 기반의 토론 공동체’를 통해 대화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지금은 말하는 사람이 외롭지 않아야 할 때다.


책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국가와 세계를 바꾸어 왔다. 그 변화는 언제나 한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책을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흔들린다.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이 생기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질서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개인의 변화는 곧 말로 이어진다. 생각이 바뀐 사람은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생각은 검증되고 정교해진다. 반복되는 대화를 통해 "이건 문제다, 바꿔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때, 개인의 의견은 사회적 요구가 된다.

사회적 요구는 제도로 구체화된다. 종교개혁을 이끈 성경 번역, 과학혁명을 촉발한 이론서들, 그리고 18세기 계몽사상이 그랬다. 루소와 볼테르, 몽테스키외의 책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읽히고 토론되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이는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을 거쳐 민주주의 제도로 이어졌다. 개인의 사유가 공론을 거쳐 사회의 규칙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명령자가 아니라, 시민의 생각을 현실로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변화가 저절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학교 교육, 출판, 공개 토론이라는 제도적 기반이 있었기에 개인의 생각은 사회로 연결될 수 있었다.


토론 참여소득은 바로 이 연결을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만드는 장치다. 토론이 일부 사람들의 여유 있는 활동에 머무르면 사회를 움직일 수 없다. 국가가 제도로 설계할 때, 누구나 생계 부담 없이 사회 문제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흩어진 생각이 모이고, 검토되고, 기록되면 그 결과는 정책으로 축적된다. 시민의 사고와 토론이 사회 인프라가 되고 공적 자산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교육도 처음부터 모두의 권리는 아니었다. 근대 국가가 교육을 의무로 만든 건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토론도 같은 맥락이다. 가짜뉴스를 가려내고, 정책을 평가하며, 민주주의에 참여하기 위해 토론 능력은 이제 필수다.


교육이 개인의 학습을 사회 발전의 자원으로 만들었다면, 토론 참여소득은 개인의 생각을 사회 발전의 엔진으로 만든다. 국가가 제도로 만들 때, 비로소 개인의 생각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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