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에 묻어 놓고 살아온 명절의 기억들을 꺼내 봅니다.
또 추석이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 16년이 넘었기에 명절날 고향을 안 간지도 오래되었다.
명절 연휴를 아내와 어제 광화문 인근 투어로 시작했다. 한복 입은 외국인들이 참 많이 보였다. K-명절 같다.
창덕궁 근처를 지나면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중년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고향은 어디려나?
송편, 보름달, 풍성한 차례상, 오랜만에 만난 가족친지들과의 추석...
그러나 나에게 추석은 자주 《검정 고무신》으로 기억된다. 청명한 기억보다는 눅진한 기억이다.
'진주라 천리길'
나의 살던 고향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진주에서도 한참을 더 내려가는 바닷가 깡촌 시골이다. 나는 고향마을에서 16년을 살았고 고향집 떠나 39년을 살아온 중년아재다. 아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나의 명절 기억은 언제나 가난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해도 너무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시절 어떤 아버지들처럼 사셨기 때문에 가장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홀로 어머니께서 억척스럽게 채워 내셨다. 와중에도 어머니의 자식사랑과 교육열은 가히 우주 최고셨다. 그 험하고 모진 세월 홀로 맞으시면서도 그 풍파를 잘게 잘게 씹어서 사랑으로 바꿔서 자식들 입에 골고루 넣어 주신 격이었다. 그래도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늘 힘에 부쳐 하셨다. 그 결과로 '그 집처럼 가난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의 대상을 꼽는다면 단연 우리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고향친구들조차 나와는 유년의 기억이 다른 부분이 많다.
옷이며 신발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못살던 시골마을이었지만, 그래도 많은 친구들이 가방 메고 운동화 신고 다녔다. 마징가제트나 로봇 태권브이가 그려진 운동화도 제법 많이 보였던 시절이었다. 도시 사는 이종사촌형이 방학 때 놀러 올 때는 외제 운동화를 신고 오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책보를 메고 다닌 때도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는 검정 고무신만 신고 다녔다. 기차표 검정 고무신만 신었는데 운동화는 넘사벽이었기에 말표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닌 친구가 엄청 부러울 정도였다. 운동화 사 달라고 떼쓰고 싶었지만 어느 날 헝겊으로 기운 어머니 고무신을 본 이후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얼마나 6.25 전쟁시절 같은 느낌이었던지, 어느 날 식사 중에 어쩌다 그 얘기를 들으신 회사 대표님께서 "네가 몇 년생인데 그런 뻥을 치냐"라고 핀잔을 주시기도 했다. 그분은 5대째 광화문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신 서울 토박이셨다.
추석과 관련된 나의 검정 고무신 첫 기억은 일종의 트라우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집 앞 연못에서 송사리 물방개 등을 잡아서 검정 고무신에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못 수초 위로 떨어진 고무신을 주워 올리려다 그만 연못에 빠져 버렸다. 허우적거리다 거의 죽기 직전 일보의 나를 지나가던 방앗간집 아주머니께서 구해 주셨다. 주문받은 추석 떡가래를 우리 옆집에 배달해 주시던 참이었다고 한다. 그날 나는 아버지께 내 검정 고무신으로 엄청 두들겨 맞았다. 위험한 곳에서 혼자 놀아서였다.
검정 고무신에 관한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추석 며칠 뒤 가을 운동회 때였다. 당시 시골 마을에서 연중 가장 큰 잔치는 가을운동회였다. 추석 직후의 가을운동회 때는 학부모들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다 동원되고 먹을 것도 넘쳐났다. 운동회의 백미 중 하나는 학년별 대표 남녀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섞여서 뛰는 계주 경기였다. 달리기 실력이 특출 났던 나는 남학생 대표였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나에게 담임 선생님께서는 고무신은 미끄러워서 달리기 불편하니까 친구 운동화를 빌려 주시겠다고 했다. 주먹만 한 녀석이 자존심은 샜던지 맨발로 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선생님 말씀 안 들으면 벌 받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1등으로 치고 나가다가 중간에 뾰족한 돌부리에 발바닥을 찔려서 움찔하는 바람에 바통을 놓쳐버렸다. 온갖 원망의 눈초리를 다 받았던 것 같다.
운동회가 끝나고 잔뜩 위축되어 있는 나를 어머니는 집에까지 업어 주셨다. 발바닥 아프도록 맨발로 열심히 뛰었으니 선물로 업어 주신 거였다. 따뜻한 어머니 등에 업혀 가던 왜소한 체구의 내가 파편처럼 기억난다.
검정 고무신의 마지막 추억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엄청난 사고를 친 기억이다.
초등학교 4학년 추석 전 어느 날이었다. 온 동네 꼬맹이들이 동네 뒷동산에서 놀게 된 날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내가 납작한 돌을 물제비처럼 숲속을 향해 날렸다. 그 돌이 팽그르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면서 되돌아 날아가더니 나보다 세 살 어린 동네 아이의 얼굴을 크게 찢어버린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 후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소식 듣고 곧바로 달려온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 무지막지하게 맞았던 기억이 있다. 겁에 질려 뒷동산 수수밭 사이로 도망을 쳤다. 검정 고무신이 어디서 벗겨졌는지도 모르고 맨발 상태로 도망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불 뒤집어쓰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에 어머니께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이미 사고의 자초지종을 동네 분들로부터 듣고 오신 터였다. 어머니께서는 보태지도 빼지도 않으시고 내가 딱 잘못한 만큼, 싸리나무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치셨다.
다음날 어머니는 말없이 내 다른 검정고무신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런데, 다친 동네 아이 치료비를 갚을 돈이 없으셨던 것 같다. 대신, 어머니께서는 그 집의 논밭일이며 바닷일을 돕는 것으로 추석 연휴가 끝날 때까지 내내 몸으로 갚아 내셨다. 그 기간 중에 밤늦게 부엌에서 소리 죽여 우시던 어머니 울음소리가 기억난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한없이 죄스럽고 울컥 먹먹하다.
내 검정 고무신의 흑역사는 5학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검정 고무신이어서 흑역사였을까? 하얀 고무신이었으면 좀 나았으려나... 5학년 설날 전에 어머니께서 읍내 장에 가셔서 처음으로 운동화와 설빔을 사 오셨을 때가 있었다. 너무너무 신났던 기억이 난다. 새 운동화가 아까워서 신지도 않고 며칠간 방 안 아랫목에 고이 모셔놨던 기억도 어렴풋하다.
그렇다고, 검정 고무신의 기억이 마냥 무겁고 쓸쓸했던 것만은 아니다.
고무신 뒤축을 앞축에 구겨 넣어서 붕붕차를 만들어서 흙바닥에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딱지치기처럼 친구들과 뒤집기 배틀도 재미있었다. 지적 인지 능력이 떨어져서 친구들한테 괴롭힘 당하던 넷째형을 구하기 위해서 검정 고무신을 벗어 휘두르면서 덩치 큰 형들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던 일화를 소재로 군청주관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검정 고무신의 기억은 내 어린 시절 감정의 비빔밤이었다.
가난과 슬픔, 어머님의 헌신과 사랑, 지독한 부러움,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독한 마음 같은 것들이 꾹꾹 눌러 담긴... 질서는 없었지만 내 인생의 양분으로서는 충분하고 훌륭했다.
검정 고무신이 아니더라도,
고향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쓰리고 아픔이었을지언정 결국에는 다독임과 추스름의 힘'이 되어 온 추억 한 자락은 다 지니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