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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찬가

헤어짐은 새로운 연결을 예고하는 축적과 소생의 공간

by 꿈꾸는 아재

한 때 나는 '이별'에 대한 트라우마와 두려움이 깊었던 사람이다.

그 상처와 두려움은 내 기억 깊숙이 빨판을 내려 거머리처럼 오랫동안 들러붙어 있었다.

그러나, 내 그릇보다 더 나은 이 세상이 결국 나를 치유해 주었다. 혹여, 그 무언가와의 헤어짐에 아파하고 있거나 헤어짐을 예감하는 분이 있다면 잠깐 머물러 주기를 소망한다. 나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본다.


Ep.1

이별에 대한 내 깊은 상처의 첫 기억은 반려견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는 개 짖는 소리가 많았다. 그때는 반려견 애완견의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녀석들은 변변한 이름조차 없이 도꾸, 메리, 쫑, 해피 등으로 불려지던 그냥 '개' 들이었다. 대부분 똥개.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에도 늘 도꾸, 메리가 있었다. 온 집안이 늘 풍비박살 나서 멀쩡한 사람도 물건도 없었는데 희한하게도 강아지는 끊이질 않았다. 유년시절 내 기억은 많은 부분이 강아지와 함께였다. 외롭고 고독한 내 어린 시절 유일한 동무였으니까. 녀석들은 유독 나를 더 좋아하고 따랐다. 맨날 슬픔과 외로움이 그렁그렁 차 있던 솔방울만 한 내 눈망울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더 따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중에 마음을 특별히 더 줬던 두 녀석이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희미하다. 한 아이는 셰퍼드처럼 늘씬하고 늠름한 자태였는데 점박이가 없는 누렁이었다. 얼마나 똑똑했던지 내 말을 대 부분 알아들었다. 양조장에 막걸리 심부름 갈 때면 주전자를 입에 물고 가 줄 정도였다. 프란다스의 개처럼 학교 가는 시간 외에는 항상 붙어 다녔다. 그랬던 녀석이 어른들이 들판에 깔아 놓은 산짐승 사냥 농약을 먹고 죽었다. 고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녀석은 그 추운 겨울밤에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새벽부터 온 동네를 뒤졌는데 온몸 안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연못에 뛰어들어 꽁꽁 얼어 죽어 있었다. 대성통곡하면서 뒷 산에 묻어 줬다.


또 한 아이는 온몸이 새까만 녀석이었다. 겁이 많아서 늘 내 품에 있었다. 분리불안증이 심해서 내가 학교에 가면 처마밑 구석 어두운데 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입이 초승달처럼 찢어지는 표정으로 달려들어 나를 넘어뜨리곤 했다. 그 녀석도 어느 날 사라졌다. 돈 몇 푼에 옆동네 보신탕집으로 팔려 간 거였다.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충격에 빠졌었다. 내가 개띠라서 슬픔이 더 컸었나.

다시는 반려견을 가까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실제로 그다음부터는 의도적으로 강아지를 멀리했다.


Ep.2

또 다른 이별의 고통은 영혼의 단짝 친구였다.

고등학교 친구였는데 3년간 자취집을 같이 썼던 친구다. 성격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난 겁쟁이 범탱이, 그 친구는 잘 생기고 풍류를 아는 착한 일진이었다. 내가 괴롭힘 당하면 늘 마징가제트처럼 날 구해주고 응징해 줬다. 어쩌다 영혼의 단짝처럼 친해졌다. 서로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는데 어머니도 나를 참 좋아하셨다. 야자 째고 시내 싸돌아 다니기도 하고, 겁쟁이인 나였지만 그 친구랑 결석하고 남해로 무전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고 그 친구는 남았다. 그래도 변함없이 자주 내려가서 같이 뒹굴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비보가 서울 하숙집 전화로 날아들었다. 그 친구가 죽었다고... 장례식날이 내 입사가 확정된 모 기관의 최종 면접일이었다. 몇 년간 내가 꿈꾸고 준비했던 곳인데 요식절차인 면접만 남았었다.

그런데, 친구가 사망한 장소가 내 시골집 가는 신작로 농로였다. 밤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내 시골동네로 가다가 사망했는데,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는 그 때 서울에 있었다. 면접을 포기하고 내려가서 친구의 삼일장을 지켰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지리산 어느 산마루에서 친구의 유골을 내가 직접 날려 보냈다. 그 후 내 인생 진로도 급변침했다.


Ep.3

내 이별의 아픔 중 가장 큰 심연의 아픔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삶의 우상이셨다. 어머니는 가시고기처럼 살점 뼈 남김없이 자식들을 위해 다 내어 놓으셨다. 가정폭력과 가난으로 고통스러웠던 내 어린 시절, 잠들기 전 나는 두 가지 정 반대의 소원을 자주 빌었다.

하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머니가 그대로 집에 계셔 주기를 바라는 소원이었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어머니가 도망을 가실까 난 늘 두려웠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서 떠나실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의 제일 목표였다. 그래서 중학교 때까지 1등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소망은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차라리 어머니가 이 집에 안 계셨으면 하는 정반대의 바람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혼자 짊어지지 마시고 자유 찾아가시라고... 그 어린 나이에 두 가지 소원을 교차해서 빈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런 나의 어머니는 평생 소처럼 일만 하시다가 생의 마지막에 암을 만나셔서 육 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치료를 거부하시고, '한 평생 가족 위해 살았으니 마지막 내 삶은 내가 결정할 수 있게 해 달라' 셨다.

어머니 눈을 감겨 드릴 때 그런 생각도 스쳤다. 차라리 자식들을 덜 사랑하게 만들어드렸다면, 그 모진 세월 덜 악착같이 사셨거나 집을 떠나셔서 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어머니 보내드린 3일 만에 큰 상실감으로 결국 나도 쓰려졌다. 병가를 내고 3주간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내 삶이 살모사 같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고통스러운 이별 경험은 한동안 '헤어짐'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회피로 이어졌다.

웬만하면 사람에 대해 쉽게 정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쩌다 정이 들었다면 무조건 오래가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도 같이 커졌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지만, 만약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그 여자가 천하에 몹쓸 여자가 아닌 이상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도 않을 거고 절대 이혼도 하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뭐든 인연이 되면 오래 함께 하고 오래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처럼 신념화되었다. 회사에서 채용면접도 많이 하고 내가 쓸 직원을 자주 뽑았는데 능력을 우선하지 않았다. 누가 오래 갈 DNA를 가졌는지 궁예의 관심법으로 골라내는 것에 더 집중했다. 겉으로는 늘 잘 웃고 쾌활하다고 평가받아서 사람들이 끓었지만, 집에 들어오면 무기력한 시절들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몇몇 굵직한 경험들을 거치면서 생각이 점점 희석되었다. 세월의 치유력 덕도 컸다.


그중 큰 치유가 반려견이었다. 내 생에 반려견은 절대 없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린 딸들의 성화를 못 이기고 한 아이를 들였다. 세상 가장 예쁜 눈을 가진 초코 푸들이었다. 이름은 누리.

반려견 들이는 것을 극혐 했던 아내도 무척 정이 들었었다. 그 아이도 나를 가장 많이 따랐는데 전생에 내가 개통령이었나 생각했다. 10년째 되던 어느 날, 녀석이 심장병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결국 1년 뒤 떠났다.

떠나던 날이 3년 전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그 전날, 녀석은 직감을 했었던 것 같다. 가족들이 잠든 밤 사이, 거친 숨 몰아쉬며 온 힘을 다해 버텨낸 녀석은 새벽에 나의 품을 찾았다. 내 품에 안기더니 채 십 분도 안돼서 안녕 눈짓 인사하고는 평화롭게 떠났다. 녀석은 지난날의 내 '이별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고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고 또 인연이 멈추기도 하고, 함께 했던 동료가 떠나고 또 새로운 직원이 입사하기도 하면서 점점 깨닫는다. 이별과 헤어짐은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이라는 생각을 한다.

떠난 자리는 텅 비어 있는것 만은 아니다. 그 빈자리가 새로운 바람길이 되어 또 다른 인연들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준다. 떠난 그 사랑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팠으면서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느냐고. 그러나 헤어짐이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진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상처는 사랑했다는 훈장이고 그 흉터는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증명서일 테니까.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과 희망을 향한 새 순의 두엄과도 같은 밑거름 아닐까?


강물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어떤 것들은 강바닥에 가라앉고, 어떤 것들은 물결에 실려 떠내려간다. 하지만 강물은 결코 비어있지 않다.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흘러 들어오고, 그렇게 강은 여전히 강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흐른다. 떠나서 비워진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채워지고, 그렇게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 아프지 않은 헤어짐이 어디 있을까만, 천년을 갈 것 같은 사랑도 언젠가는 헤어진다.

생각해 보면, 오래된 것만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짧았지만 선명했던 순간들도 내 삶을 빛나게 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더 사랑하자. 그것이 어제의 이별에 대한 오늘의 화답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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