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이 너무 좋았던 나는 축복받은 사람
직장의 하루는 ‘다름의 용광로’이다.
제 각각 다른 사람들을 같은 공간에 욱여넣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매일 아침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다름의 용광로’가 가동된다.
누구는 표정이 밝고 누구는 어둡다. 누구는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어서 피로하고 또 누구는 전날 과음으로 피로하다. 누구는 사무실이 떠나갈 듯이 굿모닝을 외치고 들어오지만 누구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앉는다. 누구는 지시받아 일하기를 좋아하고 누구는 간섭이나 참견을 질색팔색한다. 누구는 동료의 일상에 관심이 너무 많고 누구는 너무 무심하다. 누구는 근거를 선호하지만 누구는 감으로 일한다. 다름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다르다는 그 사실만 언제나 같을 뿐이다.
제철소 용광로는 거대한 솥에서 모든 다름의 색을 태우고 오직 ‘뜨겁다’는 감각만이 지배하는 주황빛 쇳물을 만들어낸다. 직장의 용광로는 어떠한가. 서로 각기 다른 농도를 지닌 노동의 붉은 피와 불순을 모조리 태워서 일의 쓸모를 빚어내는 ‘연금술의 공간’이다. 시뻘건 불길이 모든 불순물을 집어삼키고 순수한 쇳물만을 남기는 과정은, 마치 직장인들이 고단을 견디고 불살라 일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과도 닮았다. 용광로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릴 수도 있는 불의 지옥이 되기도 하고 창조의 천국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창조의 천국을 ‘밥벌이’ 혹은 ‘나의 살아있음’으로 그저 소박하게 이름하였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뜨거운 내 피를 삼킬 일터라는 고로’에 나만의 ‘다름’과 ‘불순’을 던져 내 천국을 만들기 위해 길을 나선다.
직장생활에서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쇳물은 묽어졌으나 직장 내 끼리끼리 문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좋으면 그저 좋고, 싫으면 이유 없이 싫어지는 경우가 많다. 붉은 싫음이 파란 좋음으로 바뀌기가 참 어렵고 바꾸는 과정도 힘겹다. 그래서, 좋았던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들어도 일단 좋음의 타래에 묶어둔다. 반대로,극적인 반전이 있지 않는 한 싫음의 육두품을 좋음의 성골 그룹에도 웬만해선 끼워주질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오프라인의 인간관계의 좋고 싫음이 유튜브 알고리즘보다 더 섬뜩하게 편향적일 때가 있다.
그런데, 서로 많이 다르지만 변함없이 좋은 동료들을 나는 가져 보았다.
그래서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 아니 소중했고 고마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곧 용광로를 달리할 테니까.
예전에는 이런 서로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잘 몰랐다. 뭐든 마지막에서야 제대로 깨닫는 것 같다.
사무실에서 함께 하는 동료들이 저마다 귀하지 않은 직원들은 없다. 모두 아롱이다롱이로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을 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마음이 더 가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생기더라.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몇몇 그들이 나와 다른 점들이 뭔지 마음속으로 꼽아 봤다.
'일단 식성이 많이 달라. 난 해산물 너무 좋아하고 그들은 고기 마니아들이지. 술은 어떤가? 그들은 고래! 몇 병씩 먹어도 끄떡없어. 난 몇 잔만 먹어도 헐렐레 하다가 지하철 2호선 반바퀴 더 돌 때도 있었지 ㅜ. 음악은 음... 난 교향곡이나 감성트로트를 좋아하고 그들은 아이돌 음악과 팝송을 무지 좋아하는군. 정치적 선호도? 빨강과 파랑이 태극기 문양처럼 나눠졌어. 평소엔 '일 잘하는 사람을 찍어 줄 거야'라고 했지만 막상 그렇게 투표한 꼴을 못 봤어. 출신학교와 출신지역? 생각해 보니 완전 다 틀리네. 업무 스타일? 난 디테일 대마왕, 그들은 콘셉트형 직관 추구형! 성격은? 나는 I에 F, 그들은 E에 T가 대부분이다. 꼽아보니 다른 점이 수두룩'
서로 그렇게 다른데도 그들은 나를 따라줬고 나는 그들을 아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구태여 따져 볼 생각은 없다. 내가 그들을 진심이라 느꼈으니 된 거고, 그들의 마음이 가식이나 아부였다면 내가 잘못한 만큼의 벌(罰) 일거다. 뭔가를 함께 만들어 낼 때의 희열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함께라서 좋았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니까 좀 슬프다. 감정의 과잉 글은 좋지 안 다했지만 오늘은 도리가 없다. 많은 면에서 달랐지만 서로를 신뢰했던 그들과 주고받았던 문자들을 펼쳐 보았다.
많이 달랐던 우리를 무엇이 지금까지 이토록 강하게 묶어 주었을까?
'다르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지 않는다.' '그의 숨은 노력을 남들은 몰라도 나는 꼭 알아준다' '어려울 때 반드시 그가 함께 해 준다.' '좋아함을 뒷거래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서로 딱 이 네 가지 정도였다.
편지로 삶과 담론을 나누는 사람을 나도 갖고 싶다는 로망을 가졌던 적이 있다.
일단 내 조건이 까다로웠다. 서로 만날 수 없어야 한다. 신비감이 사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다른 사람이어야 했다. 격론 속에서 수긍받거나 수긍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마지막으로 글벗을 원했다. 그 글이 그 사람으로 느껴지는 맛! 그런데 이쯤 말하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나만의 망상이라는 것쯤은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냥 그런 내 잡생각의 시절이 있었다는 거다.
삶의 궤적과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은 완전히 달랐지만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은 인물들을 떠올려 본다.
조선 중기,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으로 격렬하게 논쟁했던 두 학자가 있었다. 바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었다. 나이는 퇴계가 고봉보다 26살 많았고 사는 지역은 영호남으로 떨어져 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상에 대해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지만, 8년간 3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경청, 존중, 존경, 우정을 나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와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주고받았던 40년간의 편지도 유명하다. 둘은 평생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은 계몽주의 사상, 철학, 국가와 군주의 역할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지만 다름을 존중했다. 훗날 프리드리히 2세는 “편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거나 오해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퇴계와 고봉을 접한 것은 대학교 때 역사를 전공하면서 읽었던 원문이었다. 그 후 편역 된 책으로 읽은 것은 20년 전쯤의《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통해서였다. 둘이 첫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때가 고봉의 나이 34세였고 퇴계는 이미 60세의 노학자였다. 사상을 놓고 맹렬하게 논쟁했던 둘이었지만, 서로의 존중과 애정은 편지의 내용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어느 편지에서 퇴계는 "그대의 반론을 읽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소(讀足下之辯 終夜不寐). 그러나 그것은 불편함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부족한 나를 더 깊이 사색하게 되었기 때문이오(然非不安 乃因足下所指 更深思索)"라고 썼다. 상대의 다른 의견이 불면의 밤을 가져왔지만, 그것을 괴로움이 아닌 지적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봉이 퇴계에게 쓴 마지막 편지의 한 구절은 이랬다. "선생님과 제가 같은 결론에 이르지 못했으나(先生與弟未能同歸), 선생님 덕분에 저는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더 넓게 보게 되었습니다(賴先生 弟得更深思 更廣視). 이것이야말로 학문의 참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此豈非學問之眞樂乎)?"라는 글이 나온다. 까마득한 후배였지만, 과감한 논박을 주저하지 않되 최고의 겸손과 존경을 바쳤다. 퇴계가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봉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동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퇴계와 고봉의 다름의 철학과 존중의 정신에 비하면, 내가 30년 직장생활에서 경험하고 체득한 '다름의 미학'은 그야말로 조족지혈 수준이다. 그렇지만, 이 시절 내 나름의 '다름의 공존' 키워드를 정리해 본다.
○ 최고의 동료는 맞장구만 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더 깊게 보게 해 주는 사람이다.
○ 내가 성장하는 시점은 상대를 꺾을 때가 아니라 상대에게 귀 기울일 때다.
○ 직장은 내 의견을 관철시키는 전쟁터가 아니라, 비판과 존중의 공용 놀이터다.
○ 서로 다름은 '부딪힘'이 아니라 '확장'의 재료다. 그 다름을 넘어서면 '벗'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