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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레나 May 17. 2023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연을 쫓는 아이들'로 유명한 할레드 호세이니의 두 번째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4번이나 읽었는데 우선 글이 술술 잘 읽히고 두 여자의,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기구한 운명을 너무 탄탄한 스토리로 잘 그려낸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마리암과 라일라는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존재하는 삶의 주인공이다. 뉴스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식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현실은 정말 구체적이고 잔인하다. 최근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정치상황과 심각한 생활고, 여성인권에 관한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미군도 포기하고 물러난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했다.


아프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인 것인가?

왜 알라신은 여성에게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알라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정리한 종교인들에 의해 위대한 신의 뜻이 왜곡된 것일까?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비교하니 그곳이 먼 은하계의 외딴 행성처럼 느껴진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내가 불평하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들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마리암은 소설 속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이다. 라일라를 만나기 전까지 17년의 세월 동안 라시드와 함께 보낸 긴 시간이 소설 속에서는 축약되어 있지만 얼마나 끔찍했을지 나는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라미(사생아)로 살아야 했던 수치심,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죄책감, 위선적인 잘랄에게 버림받은 아픔, 어린 나이에 하루아침에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두려움, 폭력적인 라시드에게 당한 고통. 마리암의 작은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물론 잘랄은 비겁했더라도 주욱 마리암을 사랑했었지만 마리암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라일라와 아지자를 만나 드디어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고 삶의 희망을 얻게 되었지만 라시드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고 결국 라일라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회한과 고통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한 마리암에게서는 슬픔과 동시에 숭고함이 느껴졌다.


라일라는 그래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타리크라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버지로부터 무한 사랑을 받고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전쟁은 하루아침에 라일라의 삶을 망가뜨려 폭력적인 결혼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라일라는 당당했고 마리암과 아지자가 있어 그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다. 라일라는 마리암을 잃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미워했던 라시드의 아들 잘메이를 키우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타리크와 함께 할 수 있었고 원했던 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되었는데 소련의 침공, 공산주의 정권 이후 소련에 대항해서 함께 싸우던 민족들이 서로 분열하여 싸우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더욱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라일라의 두 오빠는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그로 인해 라일라의 어머니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이 땅에서 소련군이 물러나는 그날만을 기다렸었는데 그녀가 영웅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더욱 심각한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그들이 서로에게 쏘아대던 로켓탄에 라일라의 남은 가족의 삶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절대 선도, 악도 없는 대혼란의 시대가 계속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피해를 입는 시민들의 삶은 비참하기만 했다. 왜 그들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하여 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그런 싸움의 끝에는 비극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불안정한 아프가니스탄 사회와 부르카 속에 갇힌 여성들의 삶을 생각하니 부르카를 입고 있지 않아도 숨이 막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슬람교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아는, 사람 좋은 외국인도 이슬람교인이다. 그런데 종교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갈등과 희생이 생겨나는 것 같다. 어떻게 이게 위대한 신의 뜻일 수 있을까?


이 책의 작가가 쓴 '연을 쫓는 아이들'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대해 전 세계 사람들이 잘 알게 되었으니 이 작가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 속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듬뿍 느껴진다. 또 가장 큰 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도 물론 정치와 종교, 민족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긴 하지만 우리네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의식이 깨어있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웃들과 서로 사랑하고 어울리며 평화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널리 알려졌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그들에게 개입하여 당장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없지만 예전보다는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 되었고 느리더라도 천천히 진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라일라와 마리암이 꼭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지자와 잘마이는 이제 커서 어른이 되었겠지. 잘마이는 라시드의 성품을 닮아서 라일라를 힘들게 하고 있진 않을까?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그렇게 바라던 라일라와 타리크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군의 주둔, 탈레반의 재집권을 거치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들이 원하던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아서 고통받거나 한숨짓고 있진 않을지, 이제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할 그들이 카불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라일라의 아버지가 희망했던 대로 절망뿐인 땅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의 바닷가 어딘가에 정착해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진 않을까?


마리암의 삶은 마리암에게 고통 그 자체였겠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마리암의 삶 전체를 바라보면 그래도 마리암을 사랑했던 나나와 잘릴, 파이줄리 선생, 라일라와 아지자가 있었고 남자 보호자 없이는 외출도 하지 못했던 그 사회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대항하여 용기를 낸 점은 아프가니스탄 사회에 작지만 큰 의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힘없이 고통스럽기만 했던 무의미한 삶은 아니라고 말이다. 빗물이 오랜 세월을 통해 바위를 깨뜨리듯이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것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소중하지 않은 생명도 없으며 의미 없는 삶도 없다.


내게 지금 큰 고통이라 여겨지는 일들도 크고 작건 의미가 있는 것이고 삶은 지나고 보면 숙연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낼 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아프가니스탄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관습과 종교 때문에 고통당하는 여성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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