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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레나 May 20. 2023

소년이 온다

도서 리뷰

작년에는 교실이 신관이라 도서관에서 멀다는 핑계로 학교 도서관에 잘 가지 않았었는데 올해는 바로 아래층에 있다 보니 자주 기웃거리고 있다. 생각보다 내 취향의 책이 별로 없어서 한참을 책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처음에 빌린 3권은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책을 반납하면서 또 서가를 기웃거리다 <소년이 온다>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한강 작가의 책.

<채식주의자>를 읽고 나는 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유명한 상까지 받은 유명한 책인데 나는 왜 소화를 시키지 못한 걸까? 그 책을 읽고 나서의 충격과 찝찝함이 아직도 남아있어 5.18에 관련된 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망설였다. 잠시 다시 꽂아두었다가 마땅히 읽을 책이 없어 안 읽히면 다시 반납할 생각으로 <소년이 온다>를 빌려왔다.


커피를 잘못 마시고 (나는 종종 커피를 마시고 심각한 각성효과로 잠을 못 자곤 한다.) 잠 못 이루던 밤, 새벽 3시 30분까지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5.18에 대해 많이 들어왔는데 왜 한 번도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관련 영화도 찾아보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보지 말았어야 할 망자들의 실제 사진도. 충격적이었다.

최근에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 씨의 뉴스를 흥미롭게 봤으면서도 5.18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이 책을 읽고 5.18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1장 어린 새

중학교 3학년 동호는 같은 집에 세 들어 사는 정대와 함께 거리로 나갔다가 정대의 손을 놓쳤고 정대가 총에 맞는 것을 보았다. 총격을 피해 집으로 대피한 뒤 다시 길을 나서 정대를 찾으러 다니다 도착한 상무관에서 실려오는 시신을 정리하고 명단을 작성하는 일을 얼떨결에 돕게 된다. 시취가 진동하는 상무관에서 동호와 함께 자발적으로 일을 돕는 사람들은 겨우 20살 전후의 어린 학생들이다. 몽둥이로 맞고 총검에 찢기고 총에 맞은 채 나란히 누운 시체들과 시체들을 닦이고 무명천으로 덮어주고 시신을 찾는 유족들에게 천을 걷어 시체를 보여주는 사람들, 시신을 확인하고 울부짖는 유족들의 모습까지.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그곳을 떠나지 않고 도울 수 있었는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2장 검은 숨

동호의 손을 놓치고 총에 맞은 정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죽어 혼이 되었다. 정대의 시체는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덤불숲 사이에 다른 시체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였다. 정대의 혼이 묘사하는 상황과 느낌을 읽으며 나는 여러 번 소름이 돋았다. '아, 정말 억울하게 죽은 혼은 이런 상태이겠다.' 싶은...

얼굴도 몸도 말도 없는 그림자가 다가와서 닿은 느낌. 골똘히 알아차리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상태. 떨어졌다가 서로 달라붙었다 하는 상태.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 나와 끌어당기는 힘들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이 구절을 읽으며 정말 소름이 돋았다. 정대의 혼이 내는 한 서린 서늘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책을 덮고 잠들었다 새벽에 깨어났을 때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정대의 혼은 군인들이 시체 더미를 불태우면서 사라져 버린다.


#3장 일곱 개의 뺨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일손을 도우면서 카스텔라를 나눠먹던 은숙의 이야기이다. 은숙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서슬 퍼런 검열이 이루어지던 상황 속에서 수배 중이던 번역자와 한 번 만났다는 이유로 형사에게 뺨을 일곱 대나 맞는다. 그런 시대였나 보다. 항의 한 번 못하고 묵묵히 맞은 다음, 하루에 한 대씩 잊어보려 한다.

출판사에서 발간하려던 책은 무자비하게 검열당해 너덜너덜해지고 그럼에도 그 책의 내용은 연극 무대로 올려진다. 검열로 삭제당한 부분을 사복 경찰들이 지키고 있는 공연장에서 어떻게 공연할까? 했는데 배우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연기한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입모양을 상상하며 나는 또 소름이 돋았다.


#4장 쇠와 피

계엄군이 다시 돌아온다고 한 날, 총을 들고 남아있다 체포된 진수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들어오는 군인들을 보고도 총을 한 번 쏘아보지도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곤 감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몇 개월 간의 끔찍했던 감옥 생활과 고문, 졸속으로 진행된 재판, 이듬해 풀려났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이 느꼈을 무력감과 분노, 아픔을 내가 100분의 1이라도 알 수 있을까? 하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다. 떠나보낸 사람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세상, 망가진 몸과 정신...

결국 진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5장 밤의 눈동자

상무관에서 동호와 함께 있던 선주 누나의 이야기이다. 선주는 군인들이 다시 돌아오던 밤, 트럭을 타고 확성기를 들고 거리를 돌고 있었다. 그러다 붙잡혔다. 그리고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518 이전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성희언니와 정미... 그런 시대였나 보다. 20살이 되기도 전에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 노동운동을 하다 붙잡혀서 두드려 맞고. 내가 누리는 이 자유가 어린 언니들의 한숨과 눈물과 상처 위에 쌓아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한없이 짠하고 불쌍했다. 그래도 참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에겐 양심이 더 중요했으니깐.


#6장 꽃 핀 쪽으로

하루아침에 막내아들을 잃고 고통의 세월을 보낸 동호 어머니의 심정이 절절하게 들려온다.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그람스로 두 눈에 핏발이 서드라이.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 그것이 뭔 소리다냐. 깜짝 놀라서 내가 그랬다이.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너까장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이다.

그리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야. 네가 죽은 것이 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은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다 같이 소복을 입고 그 살인자가 탄 승용차가 오기를 기다렸다이. 정말로 아침 일찍 그 놈이 나타났다이. 소리를 맞춰서 구호를 외칠라던 계획은 엉망이 됐다이. 다들 울부짖고 졸도하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소복은 찢어졌다이. 현수막은 펼쳤다가 바로 뺏겼다이. 경찰서에 다같이 끌려가 넋을 잃고 앉아있는디, 우리하고 다른 곳에서 시위하기로 했던 부상자회 청년들이 잡혀들어왔다이. 시무룩이 줄을 서서 들어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마주쳤는디, 한 청년이 갑자기 울면서 소리쳤다이.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고?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전두환은 1987년까지 대통령을 했고 90살까지 잘 살았는데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받지 못하고 마음 속에 응어리졌을 그 억울함과 한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유가족들은 그 때 집으로 데려오지 않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죄책감으로 살아가는데 명령을 내리고 폭력과 살인을 일삼은 자들은 뻔뻔하게 호위호식하며 살아있었다니.


#에필로그

작가는 열 여섯 살 동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광주에 내려가서 상무관과 신묘역과 옛 집터와 동호의 형을 마주한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화려한 휴가> 영화를 찾아보았다. <소년이 온다>와 <화려한 휴가>에서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야."라고 뛰쳐나가려는 사람들을 말리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정말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뛰쳐나가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남아 있었는데 돌아온 것은...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럽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소름 돋는 역사적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전우원 씨의 사과가 왜 그렇게 화제가 될 수 있는지 이제 제대로 이해했다. 이순자 씨가 손자에게 할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지. 죽는 순간 새처럼 몸에서 튀어나간 그 수많은 혼들이 서울까지, 연희동까지 날아갈 수 없어서였을까. 서로 달라붙어 서로를 궁금해하고 느끼던 혼들이 너무 힘이 없었을까. 그들 주변에서 어른어른거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을까. 내가 직접 보고 겪지 않은 일인데도 분노감에 부들부들할 수 밖에 없는데 유가족들은 어떻게 그들을 암살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내가 <더글로리>를 보고 너무 좋았던 것은 피해자에 의해 가해자들이 복수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주여정과 문동은이 교도소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정말 쾌감마저 느껴졌었다.

누군가는 용서만이 진정한 복수라고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나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2월에 광주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광주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라 호텔을 잡고 일박을 할까 생각하다가 아무리 찾아봐도 애들이랑 가볼 만한 곳이 없기에 그냥 당일로 결혼식만 다녀왔었다. 광주는 가볼 만한 곳이 없는 도시가 아니었다. 충장로, 전남대, 518 관련 공원과 재단을 꼭 방문해 보고 싶다.


아직도 혹자들은 광주사태니, 광주폭도들이라는 말로 망자들을 폄하하고 있다.

여러 논문과 조사, 외신 기자를 통해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희생되었음이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이 책의 동호처럼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던, 중학생을 포함해서 말이다.


길 가던 사람을 빨갱이라며 마구 두들겨 패고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일은 이제 앞으로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518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독재와 불합리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후세에 남겨준 유산인 것 같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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