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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레나 Aug 02. 2023

여행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나는 여행이 좋았다.

초등학교 때 나는 사회과부도 책을 참 좋아했었다. 할 일이 없으면 사회과부도 책을 펼쳐놓고 우리나라 지도부터 세계지도까지 책 전체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곤 했었다.


내가 어릴 때는 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니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아빠는 자주 우리를 아빠의 작업용 트럭에 태우고 가창이나 청도로 나들이를 데리고 다녔었다. 더운 도시의 열기에서 벗어나 가창의 한적한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트럭 짐칸에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별구경도 하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부곡하와이나 문경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기억도 난다. 그때부터였을까. 낯선 곳에 가서 낯선 곳의 분위기를 느끼며 걷거나 낯선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친구와 둘이서 베트남으로 배낭여행도 다녀오고 자취하던 동기들과 소매물도나 지리산 등지로 즉흥 여행을 떠나기도 했었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제주도와 가까운 해외로 여행을 해마다 꽤나 많이 다녔다.

좋지 않은 여행은 없었고 새로운 나라, 장소, 분위기는 언제나 날 들뜨게 했다.


그리고 돌아보면 여행지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여행지의 어느 거리를 걸어 다닌 순간들이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무대이기도 하며 여행자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그 지역의 거리를 걷는 순간이 가장 여유롭고 편안하며 내 여행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시간인 것 같다. 걷다 보면 새벽부터 길거리 좌판을 펴고 아침 손님들을 상대로 쌀국수를 팔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쿵짝이는 음악 소리와 함께 여유 넘치는 휴양지의 분위기를 마주할 수도 있다. 운 좋게 예쁜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만나 눈빛을 반짝이며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우연히 그 끝에 멋진 풍경의 바다가 펼쳐진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 행복한 소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지나간 여행을 떠올리면 그 거리의 소음과 냄새, 분위기가 그리워지고 다시 그곳에 있고 싶어 진다.


이번에는 발리로 장기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행을 준비하면서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자각할 수 있었다. 원래 여행 준비 과정이 설레고 즐겁게 느껴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왜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완벽한 여행을 준비하려는 내가 인상을 구기고 휴대폰과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베트남 배낭여행을 갈 때에는 론리플래닛 책 한 권만 가지고 숙소 예약도 없이 갔을뿐더러 기차표 예매를 잘못해서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었지만 너무 기억에 남는 즐거운 여행을 했었다.


그런데 숙소 예약을 완벽하게 마치고 일부 현지 투어 예약에 마사지샵 예약까지 마쳤는데도 뭐가 이리 불안해서 안달일까? 애들을 데리고 가는 여행이다 보니 애들이 힘들어하고 짜증을 내어 여행을 망칠까 봐, 큰돈을 들여 가는 여행인데 헤매다가 시간을 낭비할까 봐, 더 좋은 장소와 루트가 있는데 내가 모르고 못 가고 못할까 봐...

이런 걱정들이 내 속에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게다가 남편이 너무 바빠서 내가 많은 것을 알아보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책임감도 큰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요 며칠 아이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눈 것 같다. 휴대폰과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여행을 알아보느라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즐기려고 가는 여행인데 가기 전의 내 모습을 보니 여행을 가서도 전전긍긍할 것이 뻔해 보였다.


마침, 카페에서 글을 하나 읽었는데 세 아이를 데리고 엄마 혼자 발리/길리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다에 휴대폰을 빠뜨려서 휴대폰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단다.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자유가 생겼고 아이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글이 너무 와닿았다.


이제 더 이상 여행을 알아보는 것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충분히 알아봤고 식당과 갈만한 곳도 어느 정도 메모해 두었고 이제는 가이드북과 메모한 수첩만 보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행을 일처럼 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실수 없이 해내려고 말이다.


여행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들 말한다. 내 인생을 계획대로만 살 수 없듯이 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만남과 발견 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을 더하고 좋건 싫건 다양한 경험치를 얻을 것이다. 선택지에 없던 것들을 선택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또 한 가지, 여행 짐을 싸면서, 가지고 갈 짐도, 남겨둘 짐도 걱정되는 상태인 것을 자각했다. 우리가 집을 비우는 동안 우리 집은 괜찮을까? 뜬금없이 냉장고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어쩌지? 하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경유를 해서 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싸들고 가는 짐이 분실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 내가 가진 것들이 너무 많으니 이런 걱정을 사서 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니멀 유목민>의 박작가와 미키님이 정말 부럽게 느껴졌다. 배낭 하나로 이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적은 그들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진심으로 그들이 존경스럽고 부럽다. 내 인생의 화두는 아무래도 '진정한 자유', '마음의 평화'인데 소유물이 많을수록 집착이 생기고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두고, 돈 몇 푼에 인상을 쓰지 않고, 시간을 자주 확인하지 않고 잘란잘란 걷고, 웃고, 편안하게 숨 쉬는 여행을 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배낭 하나만 둘러매고 훌훌 진정한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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