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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치 Sep 19. 2021

쓰는생활

20210304

내 두통은 원래 아주 루틴한 경향을 띄고 있었다. 눈알 뒤쪽을 가는 꼬치 같은 걸로 쿡쿡 찌르는 형태였는데, 보통 건조하고 피곤할 때 찾아온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두통의 지평을 열었다. 손오공의 긴고아를 쓰고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금속 테까지는 아니고 탄성이 적고 딱딱한 고무 형태의 긴고아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숙취가 심할 때 오는 머리 깨지는 아픔 같기도 하고. 눈을 잘 못 뜨겠어서 부러 감고 있으면 눈꺼풀이 전기라도 오른 것 마냥 파들거리는데, 화가 나서인지, 머리가 아파서인지, 잘 모르겠다.

뭐지.

뭐야.

혈관이 부풀어 오르는 걸까? 식생활과 와생활을 바로 해야지. 까딱했다 뒷목이라도 잡고 쓰러지면 안 되는데.

/

어젯밤에는 비눗방울을 신나게 만들었다. 크고 둥그런 비눗방울들이 일제히 지붕 위로 날아갔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어떠한 귀의의 현상으로 보일 정도로 경건하여, 깊고 청명한 어두움을 헤치고 나아가는 순례자 같은 뒷모습이었다. 우리는 빛의 난반사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득히 멀어지는 구체들에게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

나의 열 살 강아지 미르는 내 무릎에 등줄기를 기댄 채로 자고 있다. 작고 연약한 나의 친구. 네가 4킬로그램도 채 안 되는 무게에 나뭇가지처럼 가는 다리로 저녁 산책길을 누빌 때 나는 너랑 발맞춰 걸을 시간을 자꾸 가늠해 보게 돼. 실수로 인식 칩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듀얼코어 강아지. 양치는 왜 이렇게 싫어해. 넌 왜 이렇게 나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지 나는 가끔 수렁에 빠지듯 문자 그대로 절망해. 이렇게 사랑을 원하는 너를 오래 혼자 둔 사람들을 원망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에서 왠지 조금 비켜난 듯한 나의 사랑들이, 가끔은 너무 보잘것없어서 미안해. 누나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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