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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 Mar 07. 2023

얼굴은 몰라도 말은 예쁘고 싶어서

멋진 말보다 예쁜 말

나는 직업상 말을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하는 사람이다. 가령 참석인원이 10명인 회의를 통역한다면 10인분 어치의 말을 해야 하니 그렇다. 동시통역이라는 것이 매분 매초 뇌용량의 한계를 느끼는 복잡다단한 작업이다 보니, 프로페셔널하게 정제된 표현을 내뱉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입에 붙은 언어가 튀어나오곤 한다. 결국 평소 언어습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라 정제된 말과 글을 듣고 읽는데 늘 열심이었다. 한창 일에 욕심을 부릴 때는 언어습관이 좋지 못한 이들과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내 귀를 통해 들어온 말들은 부지불식간에 내 입으로 다시 흘러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좋은 언어습관이라는 것이 길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연차가 쌓이다 보니 더 이상 그런 스트레스는 받지 않게 되었는데,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막역지기들과 밤새 이어지는 수다가 삶의 큰 낙이었던 나다. 언젠가부터 대화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는 처지가 돼버리니 내 일에 대한 회의감도 무섭게 커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에 대한 욕심이 줄어서이기도, 또 그게 아니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도처에 널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완벽한 언어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과 스트레스가 사라진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를 옮기면서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통역을 할 때면 문득문득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순간만큼은 타인에게 빙의라도 한 듯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표현하려고 애쓰니 전혀 엉뚱한 발상은 아닐 것이다. 발화자가 웃으면 나도 웃고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낸다. 그래야만 정확한 의도가 전달될 수 있다 믿으면서. 한 번은 연사가 도중에 우는 바람에 같이 울어버린 적도 있는데, 그날 유독 통역이 좋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칭찬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동시통역사에게 최고의 칭찬은 통역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기능을 생각한다면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통역일 테니까. 그날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비아냥댈 수밖에 없었다.


'배우 나셨네, 아주 배우 나셨어.'


어쨌거나 훌륭한 배역에 몰입하는 것은 어찌나 재미있고 신이 나던지! 논리 정연하면서도 우아하게 펼쳐지는 말의 항연만큼 세상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밥벌이가 어디 그리 만만한 것이던가. 마음에 드는 배역을 골라 맡을 수는 없었다. 내가 연기해야 하는 대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펼치는가 하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게 웅얼거린다거나 비문이 넘쳐나기까지 한다면? 당최 몰입이 되지 않으니 연기대상을 따기는 애초에 틀린 셈이었다.


어떤 배역을 맡든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해서 파고들다 보면, 표면에 드러난 언어를 넘어 그 언어가 빚어진 생각을 따라가게 된다. 혼신의 연기를 마치고 난 뒤에는 잔상이 남는다. 어떤 잔상이 남느냐는 비단 얼마나 논리적인지, 적확한 표현을 쓰는지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성적인지 아니면 감성적인지, 긍정 또는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쓰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아우라가 있다. 그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가 반영되어 만들어지는 그만의 아우라가.


연차가 쌓이면서 깨달은 것은 얼마나 훌륭한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화자의 언어에 치명적인 오류만 없다면 누구나 맥락을 통해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 통역이 끝난 후 남는 것은 그의 말이 만들어내는 인상, 결국 그라는 사람이 가진 분위기였으니. 게다가 논리적으로 말을 잘한다고 꼭 호감이 가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남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이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좋아지고 그의 삶이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돌이켜보면 똑 부러지게 말을 한다고 내 뜻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이를테면 직장상사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거부한다거나, 아빠에게 자꾸 술을 마시니까 건강에도 해롭고 엄마가 힘들지 않으냐고 타박을 했던 기억이 꼭 그렇다. 분명 한치의 오류도 없이 맞는 말이었지만 그 뜻이 관철되기는커녕 그들의 반감을 키웠을 뿐이다. 나 또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들을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냉정한 말로 치부한 적이 왜 없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논리적이고 멋진 말에 집착하는 대신, 내가 남기는 말의 잔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완벽한 언어습관 대신,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나만의 아우라가 가지고 싶어졌다. 그리고  말이 누군가에게는 따듯한 잔상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외모보다 말에  신경 쓰게 되는 것은 얼굴은 몰라도 말은 예쁘고 싶어서왜인지 자꾸만 말수가 줄어드는 것은 아마  말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서...


오늘도 몇십 인분 어치의 말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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