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고백
꼭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은 지인이 있었다. 한 달 전부터 미리 식사약속을 잡아두고 그에게 꼭 맞는 선물을 고르면서 어찌나 설레고 좋던지. 지인과 만나 정성껏 고른 선물을 건네고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정겨운 대화가 넘실대며 오갔고, 식사도 서비스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언제나처럼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000의 직원들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니 존중해 달라는 말이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되풀이되었다. 오죽하면 이런 안내방송을 틀까 싶어 우리는 직원들에게 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지인과 가볍게 산책을 하면서 고백 아닌 고백을 해봤다. 사실 나는 이 말이 불편하다고. 자꾸 듣게 되는 이 말이 나를 쿡쿡 찌른다. 그럼 가족이 없는 직원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얘기인가 싶기 때문이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남보다 못한 가족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삐뚤빼뚤한 마음도 불쑥 고개를 내민다. 물론 그러한 의도는 전혀 없으며 곡해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그날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말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아픔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불감증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것 같아서.
비단 가족이 없는 사람이 느낄 소외감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 그걸 현실로 마주하는 것이 나는 조금 힘들다. 그저 사람대 사람으로 존중해야 하는 것을 왜 매번 가족을 운운해야 하는 걸까... 내가 존중받고 싶듯 그저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은 조건부가 아니면 싹트기 어려운 걸까?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이 있는 법인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아픔에도 무감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렇게 품기 어려운 걸까?
지인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심 배배 꼬인 사람으로 비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그 속을 들여다보듯 그는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시간이 지나면서 안내방송의 내용도 바뀌지 않겠냐고.
그런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직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기에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날이. 그런 안내가 불필요해진다면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