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람을 상대하는 일만큼 까다롭고 피곤한 일이 있을까. 나만 잘하면 되는 일, 내 실력만 갖추면 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바람대로 동시통역사가 되었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력을 떠나 프리랜서에게 영업활동은 선택보다는 필수에 가까웠고, 조직을 선택하니 인간관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연차가 쌓여 후배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버리기까지...
나는 직장에서만큼은 철저한 메리토크라시 신봉자다. 프리랜서 생활을 오래 해서일까? 실력만큼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으며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직장생활에 상당한 회의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 생각이 쉬이 바뀔 것 같진 않지만, 직장에서 필요한 것이 실력만은 아니라는 것도 자꾸 느끼게 된다.
실력이 뛰어나지만 조직 전체에 대한 기여도는 낮은 사람이 있는 반면, 개인의 능력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묵묵히 맡은 일 이상을 해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조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팀원들만 보더라도 한 명 한 명의 특성이 다 다르다. 그 장단점을 파악해 제 역할을 찾도록 독려하는 것이 관리자의 역할이겠지.
팀원들의 성과를 관리하라는 얘기를 듣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들에 대한 평가였다. 뭘 잘하는지, 부족한 부분은 뭔지 따지다 보니 어느새 내 나름의 잣대로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있었다. 문제는 한번 붙여버린 꼬리표는 좀처럼 떼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꼬리표를 붙인 팀원에게서는 이기적인 모습만 눈에 밟히니 직장생활이 더 퍽퍽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보이는 일부분만으로 그들을 규정짓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내 평가가 공정하다는 자신도 없다. 아무리 일로 만났다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이다 보니 유독 마음이 가는 친구가 있는 반면 영 정이 안 가는 친구도 있기 때문이다.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매번 핑계를 대는 후배에게는 도무지 마음이 써지지 않는다. 모두에게 동등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는데, 이런 내가 누굴 관리한다는 말인가.
조직장에게 매니저 트랙을 타지 않겠다 여러 번 얘기해 봤지만, 늘 그렇듯 돈 받고 하는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다가 문득 자문하게 되었다. 어째서 원하지도 않는 일을 잘하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까?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조바심을 낳고 유연한 생각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뭐든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옥죄는 마음이 후배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알량한 평가로 이어진 것 아니겠는가...
잘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해지기로 마음먹고 후배들에게 달았던 꼬리표를 다 지워버렸다. 마치 직소퍼즐 조각처럼 저마다가 제각각인 듯 보이지만, 서로 맞는 홈을 찾아 하나씩 맞춰지며 큰 그림이 완성되는 것일 터. 어떤 조각이 더 훌륭하냐를 따졌던 무용함을 깨닫고 생각해 본다. 각각의 모양이 잘 드러나게 한데 모으는 것만으로 나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기를 기대해 보련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조각들은 한 번씩 그 위치를 바꿔주면서.
다만 버리지 못한 욕심이 하나 있다면, 알량한 핑계는 대지 않았으면...
선배입장에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후배를 예뻐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는 걸,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