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책
일찍 일어났다. 늘 하던 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를 한잔 마시고 책을 펼쳤는데 오늘따라 글이 눈에 담기지 않는다.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나 읽어도 도통 책장이 넘어가지 않으니 답답해져서 책을 덮었다. 그냥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매일 하던 루틴을 깨고 싶은 날.
창밖을 보니 보슬비가 오는 것 같았다. 걷고 싶었다. 아직 잠들어있는 가족들의 아침을 간단히 준비해 두고 집을 나섰다. 비를 좀 맞아도 좋겠거니 싶어 단출하게 후드티하나 꿰어 입고 우산대신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다. 땅이 젖은걸 보니 밤새 비가 왔나 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빗방울이 톡톡 얼굴에 떨어진다. 그게 오히려 상쾌해 모자를 벗어 들었다. 걷다 보니 슬쩍 저 구석에서 해가 고개를 내민다. 어느새 활짝 핀 개나리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인다. 촉촉한 바람에는 콤콤한 흙내음이 묻어난다. 언제 맡아도 좋은 비 냄새에 취한 건지, 패트릭 왓슨의 몽환적인 목소리에 취한 건지... 잠시 눈을 감아보니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 것만 같다.
큰길에 들어서니 아직 이른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바쁘게 오간다. 눈에 잠을 그득 담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왜 학교에 갈 땐 항상 졸린 걸까. 배낭을 메고 종종거리며 걷는 모습이 참 귀엽다.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도 보인다. 무슨 사정으로 이렇게나 일찍 출근을 하는 걸까. 그들의 읽을 수 없는 표정을 보니 왠지 애잔해진다. 나도 일하러 가야지...
한 네 정거장은 걸었나 보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신호등이 빨간 불을 깜빡인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는 곧장 초록불만 만나 쉼 없이 걸었다. 잠시 기다리면서 문득 내 삶의 길에는 신호등이 몇 개나 있을까 생각해 봤다. 금방 초록불이 뜨니 왠지 발걸음도 마음도 바람결처럼 가벼워졌다. 한 번씩 빨간불을 마주쳐도 이렇게 잠시 쉬어가면 그뿐이구나 싶어서.
부러 인적 드문 골목길을 찾았다. 보는 이 하나 없으니 괜히 팔을 휘적거리며, 한 번씩 빙그르르 돌기도 하며 춤추듯 걸었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새비지 가든의 truly madly deeply에 심취해 다시 눈을 감으니 내가 걷는 길이 산길이고 바닷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