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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Jan 23. 2024

우리를 존엄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보라매병원 사건을 되짚어보다

집에서 죽기를 원하는 비율이 70%를 넘지만, 실제로는 병원에서 죽는 경우가 70%를 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집에서 죽을 권리’, 그다지 어마어마한 권리가 아닌 듯한데, 어느 누구도 선뜻 자신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집에서 죽기를 원하는 걸까?  


병원에서 ‘객사’하도록 두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치료가 무의미해진 환자가 집에서 임종하기를 원할 때,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가는 것이 병원이 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고 한다. 또한 퇴원한 환자가 집에서 임종하면, 의료진이 방문해서 사망진단서를 써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는 것에 대한 법적 규정은 없었으나, 의료진과 가족이 합의해서 중단하곤 했다. 그러나,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을 겪으며 분위기는 급변했다.      


58세의 환자가 집에서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 그는 보라매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아 혈종은 제거하였으나, 뇌부종으로 호흡이 돌아오지 않아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그의 부인이 달려왔다. 의사는 계속 치료를 하더라도 회생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수술 다음 날, 남편이 사업 실패 후 17년간 가족을 계속 구타해왔으며, 앞으로 발생할 치료비는 물론 지금까지 나온 병원비 260만 원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며 퇴원을 요구했다. 의사들은 퇴원하면 환자가 바로 사망할 거라며 말렸지만, 부인은 강경했다. 결국 의료진은 ‘퇴원 후 환자의 사망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귀가서약서를 받고 나서 환자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도착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자 환자는 5분 뒤 사망했다.      


사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고, 사건은 법정으로 갔다. 1998년 1심 판결에서는 사법사상 처음으로 의사의 치료 중단에 대해 살인죄가 적용되었다. 1심 판결 직후, 정부는 회생 불가능한 환자여도 사망할 때까지 생명 연장 장치를 떼어낼 수 없다는 고시를 의료현장에 보냈다. 7년만인 2004년, 대법원은 아내에게는 살인죄를, 담당 의사들에게는 살인방조죄를 확정했다.      


사건 발생 초기 여론은 ‘누구보다 환자의 생명을 중히 여겨야 할 의료계의 생명 경시 풍조에 쐐기를 박은 판결’이라며 대체로 판결 내용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인데도 가난 등의 이유로 치료를 계속 받기가 힘든 상황일 때, 병원이 무책임하게 치료를 중단해왔다는 비판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판결 이후 병원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중환자실 의사들 사이에서는 자칫하다간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깊게 자리 잡았다. 환자 측에서 불필요한 치료를 원치 않더라도 중단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 됐다. 소생 가능성 없는 환자를 ‘집에서 임종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요구도 모두 거절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환자를 사이에 두고 가족과 의사들이 싸움을 벌이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공교롭게도 대법원 판결이 난 2004년,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비율이 집에서 임종을 맞는 비율을 역전했다.      


사건을 접하며 무언가에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가정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며 가정을 유지해왔던 환자의 부인, 지금까지 나온 병원비를 위해서 전세 보증금을 급하게 빼내야 했던 상황, 그리고 살인자라는 판결...      


생명 경시에서 생명 존중으로 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사회적 바램은 실현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필요한 치료를 멈춰야 하는 생명 경시에서, 처벌을 면하기 위해 환자를 볼모로 삼는 또 다른 생명 경시로 변화되었을 뿐이다. 애초에 생명 경시의 문제는 단지 가족과 의사를 처벌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우리 마음 한편에도 ‘돈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잔인함이 조금씩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건강보험 등의 제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받을 권리, 살아갈 권리가 예전보다는 훨씬 더 인정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양극화, 불평등의 문제가 더욱 깊어지는 상황을 볼 때 문제의 근원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존엄사’가 많이 이야기되는 요즘, 도대체 ‘존엄함’이란 무엇인지, ‘존엄생’은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의 어떤 바램과 욕구가 이런 단어 속에 들어있는지를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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