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을 알리는 광고성 글
2020년 11월, ‘제주 평생살이’를 위해 물건너 이사를 감행했다. 11월인데도 생각보다 꽤 따뜻했고 맑은 날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겨울이어도 양배추, 브로콜리, 콜라비 등으로 푸르른 밭을 보며 신기해했었다. 이젠 신기함 대신 익숙한 이웃을 보듯 친근한 눈길을 보낸다. 이렇게 제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제주에 오기 몇 년 전 지리산에 있을 때부터 나는 유기농 가공식품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식 작업장을 갖추고 하는 일은 아니었고, 집에서 하나하나 필요한 도구들을 갖추어가면서 해보는 실험단계였다. 시골에서 농사로 먹고살 수는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면서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친환경, 발효, 제철식품 등을 음식 만들기의 방향으로 잡았다. 된장, 간장, 땅콩버터, 바질마늘잼, 계피양파잼, 바질페스토, 유자청, 레몬생강청, 팔삭초(팔삭은 제주의 토종 자몽이라고 한다) 등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수입이 적고 불규칙했지만, 좋은 음식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만든 음식의 반응이 좋거나 뭔가 창의적인 레시피가 떠오를 때의 행복감은 꽤 쏠쏠했다.
지구 보편적 문제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농약 사용의 선두국가이다. OECD 평균 헥타르당 농약사용량이 0.65kg인데 비해 한국은 9.32kg(14.3배)이고, 에너지 사용량은 37배라고 한다. (식량닷컴, 세계에서 가장 농사 잘짓는 한국농민 "농약사용량도 최고“)
자연을 지키는 버팀목 역할을 해온 농사가 이제 자연을 헤치는 칼을 휘두르고 있다. 농사, 공장, 쓰레기매립장 등으로 이제 시골의 자연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을 지키는 농사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며 좋은 먹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는 소수의 농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진안에서 자연농 농사를 짓는 언니 부부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먹거리 만들기 일을 접게 된 계기는 2022년 4월에 있었던 교통사고였다. 지금은 완벽하지는 않으나 예전의 몸 상태를 거의 회복했다. 그러나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쪼그려 앉기 등이 예전만큼 잘 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먹거리 만들기가 내 생계 수단이 될 수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끔씩 내가 그때 죽었더라면, 살았는데 신경을 다쳐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이제 익숙해져서 당연하다가도 문득문득 기적같다.
이런 시간을 거치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제주에 막 내려와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상을 만들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구순과 아버지의 1주기를 맞아서 만든 영상이었다. 옛 사진들과 영상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부모님과 만났다. 사진과 영상을 고르고, 글을 쓰고, 글을 읽으며 영상을 만들어갔다.
원래 아버지의 영상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만들어서 ‘당신은 이렇게 위대한 삶을 사셨다’며 보여드리고 싶었다. 생각에 그치고 1주기 때야 만들었는데, 아버지가 보셨다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머니와 나는 이 영상들을 가끔씩 보곤 한다. 어머니는 예전에 봤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항상 새롭게 어떻게 저렇게 다 만들었냐며 신기해하신다.
몇 년간 부모님의 생을 바라보며, 늙음, 질병, 치매, 죽음, 삶의 의미 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각자가 살아온 삶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그 사람 고유의 삶이기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문화에는 삶의 가치를 담아낼 그릇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염장이 유재철 씨는 『대통령의 염장이』에서 고인의 인생은 모두 다른데, 고인을 모시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았다고, 장례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내가 하려는 인생영장 제작일이 그 부족한 그릇의 하나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한다.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감사, 축하, 애도 등 그 사람의 인생에 따뜻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작품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산굴뚝나비는 멸종위기야생생물 1급이자 한라산을 상징하는 깃대종이다. 한라산 해발 1500m 정도에서 살던 종인데, 이제는 1700m는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자신이 살 수 있는 서늘한 곳을 찾아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백록담까지 밀려 올라가다가 멸종할 가능성도 이야기되고 있다. 나의 영상 작가명으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