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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Feb 23. 2024

대체 존엄이 뭐길래

존엄수난시대의 길찾기

‘존엄’, 일상에서는 말하거나 들을 일이 거의 없었던 단어인데, 언제부터인가 종종 듣게 되었다. 주로 ‘존엄사’라는 말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은 터라 이 단어를 접할 일이 많았고 궁금해졌다. 도대체 존엄이 뭐지? 어떤 상태면 존엄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함부로 범할 수 없이 높고 엄숙함, 사전에 쓰인 ‘존엄’의 뜻이다. 헌법 10조에서 39조까지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 첫 조항인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있다. 특별한 사람이어야 존엄한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높고 엄숙한 존재라는 것이 헌법 정신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 첫 조항에 존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면,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어떤 것일 거다. 마치 공기 없이 살 수 없듯, 존엄 없이는 우리의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고 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듯하다.      


2016년 만들어진 연명의료법을 ‘존엄사법’이라고도 부르는데, 존엄사에 대한 정의가 명확히 합의되어 있지 않아서 논란이 되기도 한다. 의사신문에 실린 시론 ‘연명의료결정법은 존엄사법이 아니다’에 따르면, 존엄사라는 개념은 미국 오레곤주의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존엄사법은 환자 스스로 약을 먹어 죽음에 이르도록 돕는 의사조력사를 허용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오레곤주의 존엄사법은 우리의 연명의료법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며, 2022년 국회에 발의된 이른바 ‘조력존엄사법안’과 비슷한 것이다.      


조력존엄사 법안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기를 원하면 이를 허용하자는 내용이다. 이 법은 정확히 말하면, ‘조력존엄사법’이 아니라 ‘조력자살법’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존엄’이라는 말로 환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을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엄’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논의하며,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언어가 자유로운 생각과 논의를 방해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존엄사’라는 단어도 종종 그런 것 같다. ‘존엄’이라는 단어를 쓰면, 그 내용을 충분히 알기도 전에 그 주장이 옳은 듯한 생각을 갖기가 쉽다. 반대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면, 심리적 저항감이 생겨난다. 그 결과 가능한 편견 없이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하기가 힘들어진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존엄이나 존엄사라는 단어는 충분하게 이야기되고 성숙해지지는 못한 단계인 것 같다. 아마 지금 우리는 존엄이라는 나무를 막 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자유롭고 충분한 이야기’라는 질좋은 퇴비가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설익은 존엄사법이라는 단어보다는 연명의료법, 조력사법 등 사실을 가능한 정확히 표현해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존엄을 이야기하는 더 좋은 방법일 듯도 하다.      


현재의 연명의료법이나 조력사 법안은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연명의료를 중단했다고 해서 고통이 자동적으로 최소화되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회의 돌봄이다. 연명의료법의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다. ‘호스피스‧완화의료’가 돌봄을 다루는 부분인데, 이 법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우리 사회의 척박한 완화의료의 현실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2008년 영국 정부는 ‘좋은 죽음’을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가족 및 친구와 고통 및 기타 증상 없이 맞이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이런 죽음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전국적으로 시행해왔다. 그 결과 호스피스 이용률이 95%에 이르는 ‘죽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 대상자도 애초에 대단히 한정적인 데다가 그 대상자 중에서도 21.5%만 이용했다고 한다(중앙호스피스센터 2021년 통계). 이는 대략 50~60%인 미국과 대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 미치는 수치이다. 어렵게 호스피스 이용 대상자가 되어도 자리가 없어서 돌봄을 기다리며 대기자로 있다가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존엄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펼쳤던 책들이다. 존엄은 몸과 아주 밀접하다는 생각에 몸의 일기도 다시 읽었는데, 처음보다 더 재밌게 읽었다.

나는 한 사회의 존엄한 생과 사의 지수는 그 사회의 돌봄 지수와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도, 조력사를 시행하는 것도 어쩌면 넓은 의미의 돌봄일 수 있다. 견디기 힘든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갖는 것은 충분히 사회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런데, 존엄한 죽음이란 주제는 단지 임종 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길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한 존재의 존엄한 생과 사를 위해 우리 사회가 서로를 돌볼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다양한 죽음의 제도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제도에 대한 찬반 양론 속에 존엄이 수난을 겪는 단계를 넘어 존엄의 나무, 존엄의 숲을 가꾸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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