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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Mar 04. 2024

딸의 환갑을 축하하는
95세 어머니의 들꽃그림 엽서

소소하고 소중한 우리의 일상이 흐른다

‘세월이 빠르구나. 

어느새 환갑이라니 

올해 내 나이는 95세란다.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산다. 

너도 예수 잘 믿고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 가자. 

사랑한다.’     


여덟 명의 자녀 중 여섯 번째로 낳은 딸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35세에 낳은 딸이 환갑이 되는 동안 어머니는 95세가 되었다.  


언니의 환갑 전날, 나와 어머니는 피아노를 치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다. 며칠 동안 저녁마다 부르면서 나름 호흡을 맞춰왔다. 생일 아침, 축하송을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그리고, 들꽃이 그려진 어머니의 축하엽서를 우편으로 보냈다. 저녁 먹기 전에 가끔씩 어머니는 『안녕, 우리 들꽃 컬러링북』이라는 색칠용 책을 펼치고 들꽃들을 색칠하곤 했다. 그 책의 뒷부분은 부록처럼 색칠해서 엽서로 쓸 수 있게 되어있었다. 어머니가 딸 환갑축하엽서를 만들어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럴까 하시며 색칠을 하고 축하말을 쓰며 엽서를 완성했다. 메신저인 나는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보냈다. 얼마 만에 우체국에서 우편을 보내보는지~ 이렇게 노래와 엽서로 멀리서 딸과 언니의 환갑을 축하했다.    

  

어머니는 그다지 자신있어하지 않으면서 색연필을 잡지만, 좋은 작품들이 나오곤 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나중에 보며, 어떻게 이렇게 그렸는지 신기해하기도 한다. 

가족 단톡방에서는 언니가 

“유엔 나이로 청년 나이가 되었네요. 

멋있는 삶, 찾고 노력하며 살겠습니다!!!^^”라며 가족들의 축하에 답을 했다.      


언제부턴가 도서관에 가면, 유아 아동 코너를 돌며 동화, 동시, 그림책 등을 빌려온다. 어머니를 위해서인데, 책마다 다르긴 하지만 어머니가 다행히 책 읽기를 좋아하신다. 어느 날인가 어머니가 책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펌프질에 “그려질 건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그린 어머니의 그림은 훌륭했다. ‘너무 대단하다’, ‘이제야 소질을 알게 되다니’ 등 가족 단톡방에선 가족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이 칭찬들을 전해주니 어머니는 막 추그린다(치켜세운다)며 웃는다.      


어머니의 그림 그리는 삶을 응원하며, 몇 해 전 어머니 생신 선물로 언니가 고급 색연필과 그림 노트, 그리고 『안녕, 우리 들꽃 컬러링북』을 보내왔다. 그렇게 어머니의 그림이 한 장 한 장 쌓여 이제 거의 20장 정도가 된다.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다. 덧셈 뺄셈을 잘하는 편이라 초등수학 문제집도 사왔다. 구구단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땐 다 일본말로 배원.”하며 구구단을 외운다. 곱셈도 어머니가 아는구나 싶어서 이제 곱셈 문제집도 사왔다. 어머니가 당연히 알 법한 것을 설명하다 잘 모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도 한다. 문제가 앞에 있으면 알아야 한다는 욕심과 기대가 작동하나보다. 어머니가 즐겁게 집중하는 시간 자체가 무엇보다 소중한 일임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치며,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아보기도 한다.      


“ABC도 알아?” 물었더니 어머니는 ABC를 외우기 시작하더니 S 쯤에서 주춤거린다. ABC송을 부르니 어머니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옛날 기억을 더듬으며 노래를 같이 부른다. 얼마 전 알파벳 책도 샀다. H를 공부할 때는 “에이취”하며 재채기 소리를 내면서 따라 쓴다. 시험, 출세 등 어떤 목적도 없는, 늦어도 너무 늦은 나이의 이 공부를 어머니가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나는 좋다.      


저녁 시간, TV를 보다가 여자들이 등에 구덕(대나무로 만든 제주의 바구니)을 지고 가는 화면이 나오자 어머니는 “구덕 진 거 보난 제주도여이?”라고 한다. “육지에선 구덕 안 져?”라고 물으니 “육지에선 머리에 이어”라고 답한다.      


밥 먹고, 책 읽고, 노래하고, 얘기하고, TV 보며 하루하루의 일상이 흐른다. 죽음을 앞둔 어느 말기 암환자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물었더니 ‘설거지’라고 답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대단하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진 일상의 삶, 소소하고도 고유한 각자의 삶이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임을 알아채는 감각이 자꾸만 무뎌져 가는 세상인 듯하다. 이 소소함의 감각이 우리의 삶을 존엄하게 하는 핵심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대단하고 훌륭해야만 가치 있는 것이라 강요하는, 왜곡되고 오염된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머니와 나는 앞으로도 소소하게 눈 마주치고 웃고 잔소리도 하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제 어머니에겐 환갑을 향해 전력질주 중인 자식이 둘이다. 그땐 우리가 어머니에게 어떤 선물을 받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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