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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n 28. 2020

어찌나 보수적인 기본소득

성배는 누구의 것인가

기본소득에 대한 화두가 봄 새싹 피어나듯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나는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입장이니만큼 그런 소식이 참 반갑다. 그러나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 대부분이 초보적인 수준의 논쟁에 그치고 결국엔 새금을 얼마나 걷어네냐 라는 차후 문제로 넘어가고 만다. 안타까운 실정이다.



여기서 대담히 말하되 세금 문제는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 여행 준비로 따지자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기초생활수급 정책이 어떤 이유에서 필요한지조차, 어떤 생각에서 이어져 내려왔는지 조차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일단 기초생활수급이라 하면 새금 걱정을 하고 또 공산주의 걱정을 하며 언급조차 꺼려한다. 여행에 가기 싫은 부루퉁한 얼굴을 한 녀석이 여행의 여 자만 꺼내도 '돈 아깝게' 트집을 잡으며 건강한 논의조차 못 하게 하는 꼴이다.



보통 그런 녀석들은 구시대 보수들이다. 자유주의 기업 주도 성장지향성에 반공정신을 지닌 보수들이다. 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승리를 자신들만의 유산이라 여기는 과도한 착각에 빠진 자들로, 이들은 실질적으로 부자들을 응원하여 더욱더 부자로 만들고 빈자들을 규탄하여 더욱더 빈자로 만드는 일을 한다. 상상 이상으로 밋밋한 저들의 생각은 인권과 거리가 멀다. 이런 심각한 사상의 퇴보는 근대를 뛰어넘어 중세-고대적 귀족주의로 까지 넘어간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에도 좌파를 정치권의 승리자로 만든 주역은 바로 이들과 이들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이런 구시대 우파의 사상적 기조는 개인의 신성한 사유재산과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몇 번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사유재산은 살아남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는 죽었다. 그럼 이에 대비되는 구시대 진보는 어떨까. 구시대 진보는 개인의 신성한 노동과 평등한 사회에 대한 믿음에서 나다. 그러나 소련의 상징적인 몰락으로 신성한 노동은 죽었고 평등한 사회는 살아남았다. 현대에서 자유 장경재를 외치는 자 중 모든 복지의 패지를 말하는 사람은 드물고, 불합리한 독점을 타파하자는 사람 중에 모든 생산수단의 공공화를 주하는 자 역시 드물다. 인권이란 약을 먹고 불합리한 사상을 구토해버린 결과이다.
그런 변화는 스스로를 무너트렸다. 시장경제의 간섭을 허용하자 개인의 사유재산권이 침해당했고 노동의 측량을 돈에게 허용하자 차별은 점점 심해졌다. 그렇게 구시대 보수와 진보는 죽었다.



현시대 진보는 초점을 노동에 두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 구조를 전복시키거나 하지 않는다. 요즘 좌파는 해체한다. 과장법을 통해 구조를 깨려 한다. 소외된 이들에게 힘을 주어 틀을 깨고,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이게 하여 틀을 깨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요즘 좌파는 극적이다. 극적 좌파의 최종 목표는 모든 구조, 모든 장애물의 제거이다. 모든 사람들을 향한 인위적 평등이 극적 좌파가 할 수 있는 최종점이다. 여기서 좌파의 고질적인 문제가 나온다. 어떤 운동을 하라고 부추기지만 행해진 그다음의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보수는 이런 좌파의 허술함을 먹고 큰다.



현시대 보수의 문제는 더 이상 자유와 권리가 아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현시대 보수의 목표는 반세계화 이다. 세계 국가를 향한 거대한 탈피 끝에 뜯어져 나간 '사소한' 살점들이 행여나 나의 국가일까 두려워, 나의 가족, 나의 동포, 나의 문화가 사소하게 뭉개져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노골적으로 이기적이 되어 우선 부유하고자 한다. 이것이 현 보수의 좌표이다. 좌파는 이런 쉽게 천박해지는 보수의 표독스러움을 먹고 큰다.



자 여기서 기본소득 정책에 더 친한 쪽은 누구일까. 본래대로라면 좌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좌파는 이미 죽었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산권을 가진 국가가 각기 평등하게 배당하는 보급이 아니라 세수 이득으로 나온 제화를 자국민의 기초생활보장 명목으로 배분하는 복지의 연장선상이다. 현 기본소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더 많은 부분을 포괄하는 공산주의적 배분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을 인지하지 못한 죽은 좌파, 죽은 보수들이 꿀 냄새를 맡은 벌꿀처럼 일어나 다시금 꿀통을 쥐어 보겠다고 시체들끼리 싸움을 벌이니, 이것이 내가 앞에서 말한 초보적인 수준의 논쟁의 실상이다.



기본소득은 성격상 보수적인 정책이고 그래야만 한다. 기존 복지를 대체하는 기본소득 역시 그렇고 기존 복지 위에 얹고 가는 기본소득 또한 부분 보수적이다. (정확히는 중도적이라 해야겠다.) 그러나 얼핏 좌파적으로 보인다. 허나 오로지 기본 세금 인상만이 좌파적이다. 그래서 모든 기본소득 논쟁이 자꾸 세금 이야기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결국 보편 인권과 가깝게 맞닿아 있는 만큼 세금 이야기는 죽은 보수의 아잰다인 자유시장을 꺼네 올 수밖에 없으며 썩은 시체 냄새를 맡은 논의자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다.



현 진보 들은 기본소득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어떤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 구조 안에서 사람들의 만족감만 높아질 뿐이다. 배부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지 않겠냐지만 편안해지면 망각하는 것이 사람은 생리이다. 현 문화 현 국가 현관계를 부수는 것이 사명인 현진 보에게 기본소득은 독 담긴 성배일 뿐이다. 그들 손에 들어간 기본소득은 결국 변하고 변해 뻔히 아는 일반 복지와 다를 것 없어질 것이다.



전통과 국가를 지키고, 변화와 혁신의 부작용을 예방하는 현 보수의 정신 기반만이 기본소득을 온전히 행할 수 있다. 기본소득기존 집단 내 구성원 간 반목 없이 만족도와 인권의 물질적인 감도를 높인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기존 문화의 가치를 스스로 모방할 것이고 자연히 집단 결속력을 강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수에 각인된 외침에 강한 집단을 이끌어네는 최종 단계 까지 닿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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