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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Jun 02. 2020

소풍과 김밥

추억

노을도 물러간 저녁 끝. 거실에 공기에 떠 있던 티끌이 바닥에 나 앉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 창밖은 어둑하고 안방은 굳게 닫혀 조용한데 홀연히 방에 나온 꼬마는 발끝을 들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당근, 우엉, 단무지, 햄, 길쭉하게 다져진 김밥 재료가 냉장고 안에서 가지런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꼬마는 드디어 내일 학교에서 소풍을 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꼬마는 기념 삼아 엄마 몰래 햄 한 가닥을 빼다 먹는다. 차갑고 짭쪼롬한 햄이 작은 유치 사이사이 씹힌다. 잠자리에 돌아온 꼬마는 기대감에 못 이겨 뒤척이다 이네 잠에 골아떨어졌다.


고대하던 소풍날,  한 시라도 소풍을 일찍 가고 싶었던 모양인지 새벽이 지나지 않았는데 꼬마는 벌써 일어나 거실과 부엌을 쏘다니고 있다.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났던 엄마는 아이 소풍에 들려 보네 줄 김밥을 싸느라 여념이 없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재료들이 올라오니 고소한 기름 냄새가 온 집 안에 퍼진다. 치익 치익 달그락 달그락, 슬금슬금 구경하던 꼬마는 어느 세 엄마 옆에 자리를 잡았다. 김이며 밥이며 김밥 말이 위에 재료들과 함께 올려 말리니 익히 알던 그 모습이 드러난다. 엄마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시고 김밥 한 조각을 썰어 꼬마의 입에 넣어준다. 시중에 파는 어떤 그 김밥보다도 맛있는 김밥이다.


꼬마네 소풍 도시락은 언제나 딸깍 딸깍 하고 열리는 직사각형 플라스틱 통이었다. 엄마는 꼬마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힌 통을 꺼내다가 갓 지어진 김밥을 가지런히 눕혀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보온이 되는 작은 도시락 가방에 오렌지 주스와 소담한 간식거리 하나 같이 해서 싸 주시면 꼬마는 그것을 들고 소풍을 떠난다.



소풍날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늘 좋은 날이 된다. 왁자하게 싸우던 아이들도 그 날 만큼은 기쁘게 웃는다. 아직 버스에 타기 전인데도 꼬마는 애들 사이에서 올라오는 기쁨을 촉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만치 양 손 가득 과자만 한 아름 싸다 낑낑거리고 오는 녀석이 웃음을 자아 네고, 유독 놀기 좋아하던 녀석들은 구석에 숨어 카드며, 딱지하며 벌써부터 놀 궁리를 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공원 적당한 곳에 모여 가져 온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각기 개성이 돋보이는 도시락들이 꼬마들의 손 위에서 경연을 펼친다. 각자 집안의 분위기가 녹아져 음식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일까. 도시락의 모양새만 보고서도 그네들의 집안은 들기름을 좋아하는지 참기름을 좋아하는지, 엄마는 어떤 성격이신지, 집안 분위기는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자기는 분식집에서 바로 사 왔다고 털털함을 자랑하는 녀석도 있고, 호기롭게 돈가스를 싸 왔다가 눅진해져 실망하는 녀석도 있다. 누구는 아예 담긴 통부터 알록달록하고 내용도 역시 알록달록하다. 그런 도시락엔 항상 당근 꽃에 방울토마토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자기가 싸 온 도시락이 가장 맛있다. 


노을이 지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 특별한 날, 특별한 기분을 한 아름 달고 집으로 돌아간다. 꼬마는 집에 와서 엄마에게 도란도란 특별함을 나눠준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엄마는 살포시 웃는다. 꼬마는 그런 모습이 너무 기뻐서 소풍이 끝났다는 허전함은 금방 잊고 내일을 위한 단잠에 빠진다. 꼬마는 그 날 사자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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