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로 돌아와 다음 행선지로 떠날 차비를 하는데 이제 차강 소브라가와 테를지 두 곳만 가면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아직 아침에 겪은 감정의 파문이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여행이 끝나간다는 아쉬움까지 더해지니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차강 소브라가 앞에 선 순간, 모든 혼돈은 일순 말소됐다. 여인의 속살 같은 하얀빛과 홍조를 띤 듯한 붉은빛이 뒤섞인 협곡은 넋을 놓게 만들었다. 협곡 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불구불 이어진 둔턱들이 장관을 이뤘다. 사막도 아닌, 계곡 아닌, 외계의 행성에 온 듯한 독특한 지형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강 소브라가는 수천만 년 전 바다와 강이 땅을 휩쓸고 지나가며 퇴적층이 겹겹이 쌓이고 바람에 오랜 세월 깎아내려 지금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붉은색은 철 성분이 산화한 결과고 밝은 회백색 지층은 석회와 점토의 조합에서 생겨났다.
햇살이 부드럽게 협곡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눈앞의 곡선과 갈라진 틈 하나하나마다 영겁의 시간이 켜켜이 들어앉아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이 낯선 곳에서 나는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저기 있어요. 내려가는 길. 같이 가요."
절벽 위에서 아래 언덕 쪽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소미가 마음이라도 읽은 듯 말했다. 자세히 보니 협곡 중앙에 골이 파여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마른 흙이 부서지며 날리는 먼지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 조개껍질 같은 퇴적물 조각들을 피해 발걸음을 내디디며 조심스레 내려갔다.
'브이'를 그리며 깊게 파인 골을 보자니 이 위로 은하수가 수직으로 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바위산을 가르는 별무리를 상상하며 그렇게 협곡을 내려갔다.
협곡 아래 풍경은 위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위에서 봤을 때의 차강소브라가는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황무지 위로 선홍빛 석회 언덕이 뽀얀 속살처럼 솟아올라 세계의 태동을 알리는 모습 같았다. 굴곡진 지면의 부드러운 곡선 때문인지 정적이고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협곡 아래로 내려가자 협곡 벽면은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규모로 다가왔다. 침식된 지형이 만든 기둥, 굴곡, 틈 그리고 단차들이 정교하게 눈앞에 펼쳐져 거대한 신전이 무너진 폐허 같았다. 색도 위에서 보다 훨씬 진한 황토색 바탕에 연보라와 붉은 갈색의 줄무늬들이 층층이 드러났다.
세상엔 인간의 시간으로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건 생기 넘치는 숲도, 거대한 폭포도 아닌 바람과 침묵과 퇴적이 만든 말라붙은 땅의 서사였다. 역동적으로 솟아오른 기둥과 부드럽게 이어지는 언덕 그리고 비현실적인 색감의 줄무늬 층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거대한 풍경을 수만 년 전에 조각하고 사라져 버린 바다의 장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한 줄기 바람에 실어 들려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