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링암, 바람의 협곡

by 성세윤

욜링암으로 출발할 즈음 해는 어느덧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도로는 한없이 길고, 텅 비어 있었다. 소미가 말을 건네자 버기는 곧게 뻗은 도로가 지평선 정중앙의 한 점으로 모이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여기, 괜찮아요. 여기서, 사진, 찍어요."

소미 말로는 여기가 몽골 도로샷을 찍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우린 하나둘 차에서 내려 스트레칭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지평선과 하늘의 경계는 숨이 멎을 만큼 정직했다. 어디 하나 흔들림 없이 평평했고, 한 줄로 그어낸 듯 곧고 또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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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경계는 이 세상이 둘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들었다. 위는 손이 닿지 않는 하늘의 무한, 그 아래는 초원이 펼쳐진 현실의 땅. 아무리 하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더라도 두 세계가 섞일 순 없었다. 하늘이 땅이 될 수 없는 건 자아가 타아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땅 위엔 소실점을 향해 질주하는 아스팔트 도로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도로는 지평선이란 경계를 뚫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였다. 또 다른 세계를 꿈꾸며 전진하고자 하는 발걸음이었다.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온 발걸음이 흙길로 다져지고 아스팔트 길로 진화하며 인류의 전진을 표상했다.

인물과 사물은 사라지고 풍경마저 선과 점으로 치환된 모습엔 어떤 인간 조건이나 삶의 본질처럼 심오한 의미가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욜링암은 매의 입이란 뜻을 가진 깊고 좁은 협곡이다. 고비사막 한가운데 있지만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협곡 구조 때문에 한여름까지 얼음이 녹지 않는 희귀한 곳이다. 하지만 얼음이 있는 건 7월 정도까지고 우리가 갔던 9월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말이 대기하는 구역이 나왔다. 말을 타고 협곡 안쪽까지 가는데 2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린 좁고 길게 뻗은 협곡 안을 따라 말을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돌길 위로 말발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고, 절벽은 그 소리를 은은하게 반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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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협곡 위 높은 절벽 사이로 간헐적으로만 내려왔고, 그 아래 바람이 시원하게 흐르며 비단처럼 부드럽게 피부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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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풍광은 아니었지만 바람 소리와 물소리만 들리는 고요하고 청량한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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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링암을 둘러보는 사이 구름이 느릿하게 밀려들었고 하늘은 점점 더 낮아졌다. 햇살은 구름 사이로 들락날락하며 희미하게 땅 위를 스쳤고 풍경은 점점 그늘에 잠겨갔다.




숙소에 돌아올 때쯤 하늘은 옅은 구름으로 덮였다. 일몰도 별도 은하수도 기대하기 힘든 날씨였다. 초원은 들꽃으로 만개했지만 희뿌연 하늘 때문에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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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늘은 도망 못 가겠네요."

아쉬움에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윤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저희랑 시간 좀 보내시죠, 형님. 저 혼자 여성 동지들 상대하려니 기 빨려 죽겠어요."

건우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보니 몇 일째 은하수를 찍겠다며 밤새 혼자 다녔다. 다음 날을 위해 일찌감치 게르에 들어가 체력을 충전할 수도 있었지만 같이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우린 각자 정비를 마친 후 주영이 있던 게르에서 모이기로 했다.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모두들 부쩍 친해진 느낌이었다. 맥주캔을 따지도 않았는데 건우가 욜링암에서 마못을 봤냐며 앞니를 삐죽 내밀고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한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자지러지게 웃었고, 웃음은 빠르게 번져 주영과 미정까지 연달아 쓰러뜨렸다.

"마못 울음소리도 들었어? 이상한 소리까지 내더라."

윤설은 건우가 관심을 끄는 게 영 못마땅한지 끼어들었다.

"너 배에서 나는 소리를 잘못 들은 거 아냐?"

건우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내가 무슨 야생동물이냐? 그런 소리를 내게?"

"야생동물 맞아. 몽골 사막에서 이 정도 버텼으면 야생 다된 거지."

윤설은 건우와 설전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팔을 뻗어 독수리 흉내를 내며 건우 머리칼을 움켜쥐었고, 게르 안은 웃음으로 출렁거렸다.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욜링암에서 말을 타던 이야기, 밤하늘을 수놓던 은하수 이야기 그리고 헝거린 엘스 캠프에서 샴푸를 쓴 걸 가지고 서로 싸우던 여대생들 얘기까지 시시콜콜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우리 사이 꽤 많은 이야깃거리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공유한 경험이 우리 만의 언어로 승화 됐고, 같은 언어를 쓴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묘한 동질감을 자아냈다. 그렇게 별 없는 밤은 웃음으로 반짝였고 우리의 시간이 쌓여갔다.




새벽 즈음 잠이 들었을 텐데 아침에 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조심스레 이불을 젖히고 창 밖을 보니 이제 막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평선 위로 짙은 구름이 깔려 있어 여명은 볼 수 없었지만 주섬주섬 카메라 가방을 챙겨 들고 게르 밖으로 나왔다.

대협곡의 웅장한 풍광도, 붉은 햇살의 찬란한 빛도 없었다. 모든 것이 움츠려 들고, 색은 한 톤 낮아지고, 소리는 조용해졌다. 자연도 숨을 고르는 듯 평온하기만 한 아침이었다.

선선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고 기분은 한결 산뜻해졌다. 게르 울타리를 넘어 초원을 향해 가는데 멀리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윤설이 삼각대를 펼치고 구름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마침 구름이 황금색으로 달아오르며 언제라도 둥근 해가 솟구칠 것 같았다. 나도 멀리서 카메라를 꺼내 윤설을 향했다.

그때 구름 위로 태양이 솟았다. 태양은 윤설의 어깨에 걸쳐 밝게 빛났다. 검은 여인의 실루엣과 옅은 황금빛 하늘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을 뺏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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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어느새 인기척을 느낀 윤설이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빠른 발걸음이 초원 위로 내디뎌질 때마다 심장이 한 번씩 주저앉았다. 내가 느꼈던 심장의 박동이 풍경 때문인지 윤설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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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은 야생화로 가득했고 햇살은 초원 가득 번졌다. 아침 풍경을 담는 내내 심장이 뛰어대며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해가 구름 위로 높게 솟아오르고 붉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여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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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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