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치자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윤설은 한나를 붙잡고 돗자리와 의자를 챙겼고, 건우는 숙소 냉장고에 맡겨 놓은 맥주를 꺼내왔다. 모두들 게르 앞에 판을 깔고 별구경 할 채비에 한창이었다. 나는 홀로 가방을 둘러메고 나왔다.
"조심하세요, 오빠."
윤설이 내 등을 향해 외쳤다. 나는 손을 한번 들어주고 내 앞을 가득 메운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밤공기는 낮의 열기를 다 식히지 못한 채 미지근하게 떠 있었다. 하지만 바람 끝 어딘가엔 찬 기운이 맴돌아 선선하게 느껴졌다. 사막의 검푸른 능선은 하늘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그 위로 별들이 하나둘 박히고 있었다. 그 별빛을 따라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초원은 밤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풀잎은 별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였고, 그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낮에는 그저 녹색의 바다였던 초원이, 밤엔 어딘가 낯설고 깊은 곳처럼 느껴졌다. 발끝에 스치는 풀잎들, 지나칠 때마다 몸을 살짝 비트는 작은 바람들,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듯 속삭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사막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졌고, 어느 순간 모래가 똬리를 푼 뱀처럼 스르르 퍼지기 시작했다. 단단하던 발의 감각은 무너지는 질감으로 변했다. 드디어, 다른 세계의 문턱을 통과한 것이다.
사막은 이미 밤의 품속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모래는 빛을 잃었지만, 하늘은 빛났다. 하늘 가득 별빛이 쏟아졌고 그 중심에서 은하수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부드러운 사막의 모래알들이 조용히 그 모든 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별과 사막과 나 사이를 방해하는 건 없었다. 광해도, 공해도, 사람도 없었다. 내 숨소리만이 조용히 귓가에 울렸다. 온 세상이 온전히 내 소유인 것만 같았다.
알람 진동에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들고 도둑 발걸음으로 게르 밖으로 나왔다. 아침 안개를 머금은 공기가 촉촉이 뺨을 스쳤다. 어제처럼 사막에서 은하수를 보겠다거나 하는 목적이 있진 않았다. 사실 어제 일몰과 은하수 풍경이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아침엔 일상적인 풍경을 즐기고 싶었다. 정상 고지를 밟은 후 느긋하게 능선을 걷듯이 말이다. 그래서 무작정 초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명 빛에 밝아진 초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멀리엔 안개 낀 사막의 부드러운 능선이 보였다. 모래는 촉촉한 회갈색 질감을 띠었고 그 뒤로 보이는 산맥은 희뿌연 안개를 칠한 듯 희미해 보였다. 벌판 곳곳에는 초록의 점묘들이 찍혀 있었다. 둥글게 덩어리 진 관목이 그늘진 땅 위로 짙은 초록과 갈색이 겹쳐진 음영을 만들며 입체감을 더했다.
그리고 얼마 뒤, 능선 한쪽이 황금빛으로 달아오르나 싶더니 아침해가 일순 솟아올랐다. 햇살이 천천히 지면을 쓰다듬듯 내려앉자, 초원 위에 듬성듬성 돋아난 풀들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던 풀잎 하나하나가 빛을 받았고, 마치 몸을 일으킨 듯 땅과의 경계에서 또렷이 분리되었다. 희뿌옇게 섞여 있던 풀과 모래, 그림자들이 이제는 다른 결을 가진 존재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빛은 어떤 임계점을 넘은 듯 초원을 거침없이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빛은 강풍을 만난 산불처럼 거세게 번졌다. 안개는 사라졌고, 황금 빛살이 길게 뻗은 초목의 가장자리와 등줄기를 따라 흐르며 풍경을 스케치하듯 윤곽선과 결을 드러냈다.
그 순간 초원은 단지 넓은 평면이 아니었다. 하나하나의 숨결이 살아있는 생명들의 군집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지는 빛은, 그것이 얼마나 잠잠한 아침이라 하더라도 세상을 깨우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나는 초원을 향해, 빛을 향해 걸었다.
일정이 여유로워서인지 숙소에 돌아왔을 때 일행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있었다. 혼자 여유로이 커피를 내리고 캠프 주위를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사막은 조용했다. 햇빛은 모래 위에 무심하게 내려앉았고 모래언덕은 무채색의 천처럼 고요하고 밋밋했다. 바로 어제, 그토록 화려하게 불타오르며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던 사막은 온데간데없었다.
색감이 빠진 모래는 모든 이야기를 삼켜버린 뒤 남은 백지 같았다. 사막은 말을 아꼈고, 감정과 형상과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문득 어떤 게 사막의 본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사막은 원래 백지일 뿐이고 어제 우리가 보았던 그 찬란한 색의 향연은 태양과 빛이 빚어낸 작품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화려한 본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이렇게 침묵하며 숨을 고르고 있는 걸까?
언젠가 나도 어제의 그 사막처럼 강인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인생의 어느 한순간 태양과 빛을 만나 화려하게 타오를 수 있을까?
지금 내 고요한 들숨과 날숨이 미래의 준비이길. 사막이 빛을 가두고, 열을 쌓으며, 침묵의 시간을 모래 속에 차곡차곡 축적하듯 인내하는 시간이길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 참고 있던 감정과 가둬두었던 숨결이 황금빛 축제로 터져 나와, 언덕 능선마다 불이 붙고 주홍과 금빛, 자줏빛 파도들이 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상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