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느지막한 시간이 되자 다시 게르 안이 시끌벅적 붐비기 시작했다. 윤설과 주영이 먼저 우리 게르에 들어왔고 잇달아 한나와 미정도 왔다.
한나와 미정은 어제 헝거린 엘스를 오르며 혀를 내두른 탓인지 등산복에 하이킹 샌들까지 신고 왔다. 이번엔 제대로 모래언덕을 체험해 보겠다는 듯 말이다.
반면 윤설은 얼굴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차양막이 둘러진 플로피 햇에 모자와 어울리는 드레시한 셔츠를 차려입었고, 주영도 하얀 원피스에 망사로 된 숄을 둘렀다. 사막과 꽤나 어울릴 법한 차림새였다.
"무슨 화보 찍으러 가냐? 낮아도 언덕은 언덕이라 힘들 텐데."
건우는 윤설과 주영을 보자 키득거리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남이사. 신경 끄셔."
윤설은 건우에게 찡그림으로 반격하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사진 좀 잘 부탁한다는 듯 생긋 미소를 날렸다. 어제와 달리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태양은 강렬했다.
10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모래 언덕은 헝거린 엘스의 절반 정도 높이였다. 모래는 부드러웠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형성된 오르막 길도 어제보다 수월했다. 딱히 맞추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시간도 딱 맞아떨어져 언덕 정상에 오르자 해가 노란 기운을 띄며 일몰의 시작을 알렸다.
드디어, 사막이 숨겨둔 본능을 드러냈다. 어딜 봐도 균일하고 단조로운 모래 알갱이들이 이토록 화려한 모습을 감춰뒀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해가 기울며 황금빛을 발하자 사막은 두 세계로 나뉘었다. 해를 마주한 사면은 불에 달궈진 듯 주홍빛으로 타올랐고, 빛이 닿지 않는 반대편 사면은 어둠에 잠겨 짙은 남청색으로 식어 갔다.
빛과 어둠의 경계는 해가 능선에 부딪혀 수십 갈래로 갈라질 즈음 최고조에 달했다. 열정과 냉정이 정면으로 맞붙은 듯 주홍빛 따스함과 남청색의 서늘함이 드넓은 모래 언덕을 캔버스 삼아 선명한 경계를 그려냈다.
하지만 태양이 능선 너머로 방향을 튼 순간, 빛과 어둠의 경계는 급속히 풀렸다. 주홍빛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어두운 자줏빛이 번졌다. 남청색의 그림자도 색을 잃고, 붉은 잔광이 섞이면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붉은빛의 잔열과 파란빛의 냉기가 어깨를 맞대며 하나의 결을 만들었고, 대비되는 두 색의 경계를 이루던 모래언덕은 하나의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으로 변해갔다.
그 순간의 사막은 어떤 말로도 완전히 담을 수 없었다. 색은 더 이상 경계가 아닌 흐름이었고, 빛과 어둠이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안겨 들었다. 그리고 그 빛이 저무는 마지막 순간, 모래 언덕은 빛과 그림자 사이 어딘가, 주홍빛과 남청색 사이 어딘가,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해가 완전히 지자, 여명으로 물든 하늘과 땅의 어둠이 사이에서 모래언덕이 꿈결처럼 잔잔히 출렁였다. 해가 언덕 끝 능선에 닿았던 게 불과 십 분 전이었는데 그 사이 천지창조라도 일어난 것 같은 자연의 변화를 목격했다. 숨이 멎을 듯 아름답고, 또 완벽한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