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린 엘스, 사막의 아침풍경

by 성세윤

다음 날 새벽. 난 다시 해가 뜨기 전 일어났다. 흐린 날씨에 은하수는 포기했지만 혹시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밖에 나와보니 여전히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는지 별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잘까 하는데 마음 한편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 조용히 숙소 앞 초원을 향해 걸었다. 초원을 지나 사막까지 가볼 참이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공기는 촉촉이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초원을 지나 사막에 이르자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막아선 구름과 사막 너머 멀리 잿빛으로 솟은 산등성이가 보였다. 기대는 이미 접었지만 밋밋한 풍경을 보며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선 마법처럼 하늘이 개며 햇살이 내비치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나 보다. 어제 오후부터 계속 흐렸고 일기예보 상으로도 오늘 오전까지 계속 흐린 날씨였지만 말이다.

모래를 밟으며 상상했다. 모래 언덕을 불태울 듯 타오르는 태양과 수직으로 떨어지는 은하수는 어떤 모습일까?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 작은 산책의 의미를 찾으려면 오늘 오후나 밤을 대비해 답사라도 해야 했다. 헝거린 엘스 같은 언덕은 아니지만 낮게 이어지는 사구와 간간이 보이는 사암 절벽을 잘 활용하면 나름 인상적인 풍경을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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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돌리던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눈앞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수채화 풍경이 펼쳐졌다. 사막은 구름 사이로 산란된 아침 햇살에 여인의 피부처럼 고운 빛깔을 띠었고 그 뒤로 키 작은 풀들이 가득한 초원이 펼쳐졌다. 초원 끝자락에는 낮은 아침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뒤론 풍경을 지켜보는 오랜 그림자 같은 산등성이가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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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산등성이와 초원과 사막이 켜켜이 쌓이며 감각을 자극했다. 산등성이의 단단함과 하늘의 모호함은 중간에 피어난 물안개의 부드러움으로 이어졌고, 초원의 농밀함과 사막의 침묵은 중간에 솟아난 연초록 초목의 생기로 중화됐다. 이질적인 풍경의 단층들이 묘하게 어우러지며 정갈한 숨결을 뿜어냈다. 모든 것이 비현실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소리는 흐려졌고 생각은 가라앉았다. 자연이 그린 거대한 회화 안에 나 홀로 청초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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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린 게르에 모여 일정을 논의했다. 계획은 일몰 시간에 맞춰 또 다른 모래 언덕을 가는 것이었다.

건우가 기세 좋게 헝거린 엘스에 다시 오르자고 하자 미정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윤설은 정말 가자고 하면 제일 먼저 발을 뺄게 건우라며 어제처럼 팔을 길게 뻗어 나무늘보 흉내를 냈다. 주영은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오늘 헝거린 엘스에 가는 게 맞긴 맞아요."

웃음이 진정되려던 찰나 한나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한나는 휴대폰으로 방금 찾았던 검색 결과들과 소미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어제 갔던 제일 높은 언덕을 보통 헝거린 엘스라고 하긴 하는데 사실 여기 사막 전체가 헝거린 엘스더라고요. 언덕마다 이름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요. 소미가 오늘은 어제 보다 낮은 언덕을 갈 거라는데 그 언덕도 사실 헝거린 엘스는 헝거린 엘스인 거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건우는 기회를 놓칠 새라 반격하며 윤설에게 적개심 가득한 눈빛을 날렸다.

모래 언덕은 일몰 시간에 맞춰 가기로 해서 출발 전까지는 각자 정비 시간을 갖기로 했다. 건우와 주영은 더워지기 전 초원 산책로를 따라 러닝을 하겠다며 구글맵을 보기 시작했고, 윤설, 한나, 미정은 모래사장을 배경 삼아 필라테스를 하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나는 게르로 돌아가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로 했다. 며칠 째 은하수와 일출을 찍겠다며 강행군을 한 터라 한번쯤 피로를 풀어줘야 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쓰러졌던 나는 어느 순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줄기에 잠에서 깼다. 구름이 걷혔는지 게르 천정에서 직선으로 빛이 쏟아졌다. 게르 안은 이미 한 겹 벗겨진 듯 환해졌고 천장 기둥과 천막 사이로 흘러내린 빛이 나를 깨우려는 듯 흔들렸다.


게르 밖은 평온하기만 했다. 공기는 놀랄 만큼 투명했고 바람이 살짝 들썩이며 너울처럼 깔린 침묵 위를 스쳐갔다. 멀리 사막과 초원 사이로 낙타 떼가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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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 대상도, 손을 흔들 이도 없고 시간마저 움직이지 않는 듯한 순간이었다. 모래와 풀, 먼 산의 능선, 그리고 게르까지, 모두 캔버스 속 풍경화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풍경을 보고 있었지만 풍경 또한 나를 바라봤다. 나와 세상이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는 액자 속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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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란 이런 걸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바람에 반쯤 쓸려 내린 발자국과 아무 말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이 무심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최초로 결심한 계기이자 가장 바라왔던 순간이 이제야 찾아온 셈인데 왠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처럼 나도 웃음과 북적거림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너는 나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여우가 말했던 문장이 걷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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