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영 감이 안 좋은데."
덜컹거리는 푸르공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건우가 말했다. 아침에 보였던 구름이 점점 짙어지며 하늘을 덮고 있었다.
"오늘 일정이 뭐죠?"
미정이 물었다.
"오늘은 헝거린 엘스. 여기가 몽골에서 제일 큰 모래언덕이지. 일단 숙소로 가서 짐 풀고 오후에 갈 거야."
주영이 휴대폰으로 일정표를 보며 말했다.
"날씨도 흐린데 괜찮을까요?"
"오히려 잘됐네. 언덕 올라가는 거 힘들어. 더운 것보단 차라리 시원한 게 낫겠다."
긍정왕 주영은 걱정하는 미정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리곤 뒤를 돌아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빤 왜 그러세요?"
"뭘?"
내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주영은 무슨 흉내를 내려는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난 그제야 내가 입을 내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날씨 흐리다니까 사진 못 찍을까 봐 그러시는 거죠? 흐흐"
"아, 아니야. 그런 건."
정곡을 찔린 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헝거린 엘스라면 고비사막 중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고, 일출이나 일몰 때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모래언덕을 감상하는 건 몽골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가장 중요한 날 하필 날씨가 이렇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얼굴에 다 드러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몰라서 일정 짤 때 여긴 이틀 있는 걸로 했으니까요. 오늘 예보는 흐려도 내일은 맑아요."
"와 역시, 언니 밖에 없다. 비에 젖은 모래언덕만 보고 간다면 정말 우울할 뻔했어."
윤설이 끼어들며 내 마음을 대변해 줬다. 어차피 이틀간 있는 거라면 이틀 다 맑은 것보다는 흐린 사막과 맑은 사막을 모두 경험해 보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기만 촉촉이 적실 정도의 가랑비였지만 바람이 워낙 세게 부는 탓에 빗방울은 실오라기처럼 흩날리며 뺨을 때리고 옷깃 틈으로 파고들었다.
소미는 계속 비가 오면 오늘 헝거린 엘스에 가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옆에 있던 버기는 금방 그칠 비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론 동그라미를 그렸다.
다행히 버기의 예견대로 숙소에 짐을 풀고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비는 그쳤다. 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뒤덮었지만 구름 아래 게르와 초원과 사막이 어우러진 풍경 또한 인상적이었다.
오후 느지막. 드디어 헝거린 엘스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길이 150km에 폭은 10km가 넘는 몽골 최대의 모래 언덕. 바람에 따라 모래가 움직이며 저주파 음이 울음소리처럼 번져 '노래하는 사막'이라 불리는 헝거린 엘스.
정상에 섰을 때 초원과 오아시스까지 어우러진 사막 풍경과 모래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이색적인 경험 때문에 고비사막 여행의 정점으로 꼽히곤 한다. 하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언덕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힘들기로 악명이 높기도 하다.
차에 올랐을 때 윤설과 미정은 긴장했는지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건우는 그 모습이 우스워 보였는지 입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뭐 그리 긴장들 하고 그래. 1 킬로미터에 300 미터만 치고 올라가면 되는데 말이야. 1시간도 안 걸려."
"그렇죠? 할 수 있겠죠?"
미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동지들. 아무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밑에서 구경만 하셔도 돼요."
건우는 깐족거리며 놀리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몽골까지 왔는데 다 같이 올라가야지. 너무 걱정하지 마. 시간도 많은데 쉬면서 1분에 한 걸음씩만 올라가도 돼. 내가 페이스 맞춰 줄 테니까 겁먹지 마."
주영은 양손을 벌려 앞에 앉아 있던 윤설과 미정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10분쯤 차를 달리자 공원 입구가 나왔고 조금 더 들어가자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들과 높다랗게 솟은 모래 언덕이 보였다. 문득 언덕을 가로지른 검은 선이 시선을 끌었다. 자세히 보니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 저기 꼭대기까지 간다고? 진심이야? 저 정도면 자학 아닌가?"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 고개를 들던 한나는 높이에 압도당한 듯 말했다.
"난 어제 먹은 양고기도 아직 안 내려갔단 말이야."
윤설도 옆에서 엄살을 부렸다.
"드디어 모래의 지배자가 나설 시간이군. 포항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유격 훈련하던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껌이지."
건우는 자신 있게 외치고는 훌훌 신발을 벗어던지며 앞장섰다.
나도 일행들과 뒤따라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첫 발은 쉽게 올랐지만 몇 걸음 뒤부터 발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 발 오르면 반 발이 미끄러지는 탓에 몇 걸음을 걸어야 겨우 한 발짝거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앞사람 발자국을 밟고 올라가요. 그러면 덜 미끄러져요."
자기는 못 올라간다며 언덕 아래서 지켜보던 소미가 외쳤다. 나는 팔을 한번 휘저어 주고 다시 언덕을 올랐다.
건우는 앞으로 치고 올라가 보이지도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올라오겠다며 미정과 수다를 떨던 윤설은 어느새 말이 없어졌다.
나는 선두에 서서 느린 속도로 페이스를 끌고 갔다. 체력도 다르고 힘든 정도도 다 다를 텐데 우린 어느새 일렬로 서서 동일한 속도로 언덕을 올랐다.
소미가 얘기해 준 대로 내가 첫발을 내디디면 뒤따라 오던 한나가 내 발자국을 밟았고 그 뒤를 윤설과 미정이 차례로 따랐다. 주영은 맨 뒤에서 앞에 선 윤설이 뒤처지지 않도록 때론 엉덩이를 밀어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숨은 가파오르긴 하지만 턱 밑까지 차지는 않을 정도로 속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올랐다.
언덕 중턱쯤에 오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네 발 짐승이 되어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건 다름 아닌 건우였다. 입을 벌린 채 흐느적대는 표정은 마치 뭉크의 <절규> 속 인물 같았고 팔다리는 모래 깊숙이 파묻혀 움직일 줄 몰랐다.
"초반에 무리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다."
윤설은 신이 났는지 슬로 모션으로 팔을 늘어뜨리며 나무늘보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본 한나와 미정은 바로 자지러졌고 우린 내친김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뿌옇게 낀 안개구름 밑으로 오아시스와 초원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한쪽으론 썰매를 손에 들고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고 옆으로는 썰매를 타고 신나게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땀 식기 전에 다시 가보자! 얼마 안 남았어."
주영은 주저앉아 있는 우릴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나는 다시 선두에 섰고 내 발자국을 따라 줄줄이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이거. 훨씬 편하잖아. 이 정도면 그냥 스트레칭이지."
혼자 모래사장에서 허우적 대며 언덕을 올랐던 건우는 내 발자국을 밟으며 걷는 게 한결 수월한지 다시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윤설은 포기했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고 주영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역시나 발자국을 밟는다고 모래언덕을 오르는 길이 쉬울리는 없었다. 건우 금세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자신이 최악의 저질 체력임을 증명했다.
"건우 너랑 운동하면 죽어 나겠다. 이 정도가 스트레칭 밖에 안될 텐데 말이야."
윤설이 입꼬리를 비비 꼬아 올리며 말했다.
건우는 전투력을 상실한 듯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뒤를 돌아 외쳤다.
"에잇... 이건 계략이야... 사막의 음모야!"
단말마 같은 건우의 외침 뒤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언덕 가득 퍼졌다.
웃음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도 우린 계속 전진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앞에 나 있는 발자국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발자국을 밟으면 발이 훨씬 덜 빠졌고 움직이는 것도 수월해졌다. 누군가 내 앞길을 걸어봤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 발걸음을 따라갈 수 있다는 건 어찌 됐건 큰 힘이 됐다. 그건 나를 뒤따라 오던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상이 가까워진다고 느끼던 어느 순간, 부쩍 바람이 세졌다. 모래가 얼굴을 때리고 눈을 찔렀다. 우린 모두 고개를 숙인 채 헝거린 엘스의 마지막 구간을 올랐다. 호흡이 목안으로 타들어 갈 즈음, 마침내 우리는 정상에 도착했다.
굽이굽이 이어진 능선은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다 멈춰 선 듯했고, 능선 위로 이어지는 곡선들은 유려하게 휘어지며 바람결에 실려 무한히 펼쳐지는 리듬을 만들어 냈다. 바람은 쉬지 않고 불었다. 모래 입자들은 능선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바람에 작은 회오리를 만들며 허공에 흩날렸다.
정상에선 두 개의 세상이 보였다. 우리가 올라온 방향으로는 여전히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의 행렬과 모래 썰매를 타고 사구 밑으로 미끄러지는 인파로 가득했지만, 반대편으로는 발자국 하나 찾을 수 없을 만큼 적막이 흘렀다. 시야 너머로 펼쳐진 구릉들이 하나같이 낮고 부드럽게 이어졌고, 그 끝엔 다시 사막이 펼쳐졌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간과 자연이 만들어낸 곡선들이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빛은 없었지만 하늘의 무거운 회색이 드러내는 살구색 사막 풍경은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유혹을 거부하지 않고 능선을 따라 걸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능선과 깊게 파인 골을 따라 걸었다. 발밑의 모래가 쉿, 하는 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바람과 모래와 나, 그 세 가지만 존재하는 순도 높은 순간이었다. 그건 잠시 허락받은 관조의 순간이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가 잠시 꾼 꿈처럼 허공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존재가 되는 순간이었다.